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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서 무죄까지 법정투쟁21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7세의 흉안 소년의 몸으로 살인 및 일반이적 죄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명으로 무기 징역을 선고받은 후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한 끈질긴 21년 동안의 법정투쟁 끝에 누명을 벗었다.
『내 일생동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입니다. 지난 21년 동안의 내 생애는 누명을 벗기 위한 암흑 속에서의 투쟁이었습니다.』
1일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문영극 부장판사) 법정을 나선 이병용 피고인(38.서울마포구 도화동1의17)은 담당 김중건 변호사의 손을 잡고 21년 동안 점철됐던 회환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 피고인은 6.25때 자위대에 가담, 양민 3명을 학살하고 부락을 습격, 쌀 4가마와 소 5마리를 약탈했다는 혐의로 군재에 구속 기소되어 52년4월 무기징역이 확정됐으나 3차례의 감형 끝에 가석방으로 출감한 뒤 64년12월 춘천지법에 재심을 청구, 이 피고인이 죽였다는 양민3명이 살인부분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일반이적부분은 재심청구가 기각되어 서울고법에 항소했었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공판에서 『①이 피고인이 죽였다고 자백한 양민3명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아 피고인의 군 수사기관에서의 자백은 사실과 어긋나는 억지자백이며 ②이 피고인이 습격했다는 마을과 감금했다는 양민의 이름이 특정돼 있지 않은 점 ③전남순천의 태양산을 거점으로 마을을 습격했다고 하나 태양산이 없는 사실 등을 종합해보면 이 피고인에 대한 공소 사실은 증명이 없다.』고 무죄판결 이유를 밝혔다.
이 피고인은 51년 3월17일 6.25때 자위대에 가담, 전남 함평군 손불면 월천리 부락민인 김팔갑(현43세) 신용선(현51세) 한석근(현50세)씨 등 3명을 죽이고 이웃부락을 습격, 재물을 약탈했다는 혐의로 육군 모 사단 특무대에 마을청년과 함께 잡혀가 같은 해 3월26일 사단보통군법회의에서 1백여명의 피고인에 끼여 무더기 재판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주일 뒤 국방장관의 승인으로 형이 확정됐다.
13년5개월의 옥살이 끝에 세 차례의 감형을 받고 64년 8월15일 가석방으로 김천 교도소를 출감한 이 피고인은 64년12월 재판관할에 따라 춘천지법에 자신이 죽였다는 3명이 살아있다는 면장. 이장발행의 신상명세서와 동일인 증명을 붙여 재심청구를 냈다.
10여 차례의 공판 끝에 668월11일 춘천지법합의부(당시 재판장 한만춘 부장판사)에서 살인부분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일반이적부문에 대해서는 재심청구가 기각되었다. 이 피고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한 신념은 이에 굴치 않고 서울고법에 항소, 3번이나 재판부가 바뀌는 바람에 항소심선고를 받을 때까지 5년이란 긴 시일을 보냈다.
억울한 옥살이로 이 피고인은 뒤늦게 5년 전에 33세의 노총각으로 김복순 여인(27)과 결혼, 3세의 아들 정복군을 두고 옥중생활동안 익힌 목공기술로 생활을 해나고 있다고 했다.
17세의 홍안소년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이 피고는 오랜 고난으로 38세의 대머리란 어울리지 않은 모습으로 변해 누명을 벗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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