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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제26화>경무대 사계(96)|김상래<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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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말기의 경무대>
59년 하반기에서 60년 「4·19」학생의거가 일어나기까지 경무대주변의 분위기는 마치 난마와 같이 어지러웠다.
한 두 사람의 손에 의해 움직였던 비서실은 말만이 비서실이었고 실제로는 부패와 암투와 상호 경계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따라서 이 박사에게 올라가는 보고는 한 두 사람의 사리와 자유당 간부 몇몇 사람의 수명연장기도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됐다.
이처럼 인의 장막에 가려진 이 박사로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들을 수가 없는 처지가 됐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박사는 도무지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며 민심이 어떤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3·15」부정선거와 「4·19」학생혁명의 진상은 세상에 자세히 알려져 있고 아직 국민의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따라서 새삼 이들 사건을 들추는 것보다는 상면의 상황이 어떠한 가를 얘기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의 경무대비서실이 박 찬일 비서와 죽은 곽 영주 경무관에 의해 움직여졌다는 사실은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이 박사에게 올라가는 보고는 두 사람 손에 의해 사전 조정된 것은 물론이다.
후일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박 비서는 만송계로 보고서는 항상 이기붕씨를 비롯한 자유당 사람들과 사전협의를 했고 곽씨는 다소 다른 입장이었다.
어떻든 이런 비서실 분위기를 놓고 비서들 중에는 『이 박사를 이렇게 모셔야 되겠느냐』고 울분을 토로하고 항의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비뚤어진 사정은 고쳐지지 않았다.
비서실 분위기는 제쳐놓고라도 경비상황도 엉망이었다.
59년 말 「크리스마스」며칠 전으로 기억되는데 북괴가 남파한 간첩이 이 박사를 암살하기 위해 경무대에 침입했다. 2, 3일 동안 본관은 2층 방에 숨어있어도 몰랐다.
이 박사 암살범은 본관 「배란다」의 물받이를 타고 2층에 올라와 며칠 잠복해 있었다.
범인이 숨어있던 곳은 원래 이박사가 소 식당으로 쓰던 방인데 만송의 아들 강석을 양자로 맞은 후 강석이 쓰고 있던 방이었다.
범인은 이방의 「커튼」뒤에서 일본도를 들고 잠복해 있다가 신모 경사에 의해 발견됐다.
마침 이 박사 가족들이 진해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 화를 입지는 않았다.
나중 조사결과 암살범은 이북에서 파견될 때 성공하면 10만「달러」의 현상금을 받기로 됐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심지어는 이 박사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면담실에 도청장치까지 되어 있었다. 도청장치는 당시 부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던 곽영주가 만들었다.
도청장치를 한 이유는 이 박사를 만나는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며 자기네에게 불리한 사실을 말하지 않나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이 박사는 도무지 실정이 어떤지를 알 수 없었고 또한 이 박사를 만나러 오는 사람도 사실을 바른 대로 예기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잘못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 박사가 사실을 얼마나 모르고 있었던가는 「3·15」부정선거직후 AP통신이 제출한 서면질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답변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정부로서는 질서를 유지하는 목적 이외에는 선거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민주당이 교사한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탈선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야당 측의 정치운동을 방해하기 위해서 경찰이 동원되었다면 그와 같은 불행한 사건(마산학생의거)이 애당초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민주당이 오히려 그들의 결정적인 패배를 호도하기 위해서 후안무치하게도 폭력수단에 호소하였다. …여하간 입후보자나 당에 대해서도 그 힘을 사용하지 말 것을 경찰에 명령했으며 경찰은 사실상 간섭하지 않았다….』
곽영주는 또 경무대경찰서 서원들도 상당수 자기 직계사람으로 바꾸었다. 경기도 이천이 고향인 곽 경무관은 이천 출신경관을 많이 경무대에 데려다 놓았는데 그래서 경무대경찰서가 아니라 「이천경찰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곽씨는 또 각종 이권에 깊이 개입되어 치부도 많이 했고 말썽도 뒤따랐다.
당시 종로2가에 있던 영보「빌딩」등이 곽의 소유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한번은 이 사실이 이 박사에게 알려져 큰 소동이 일어났다. 평소 비서나 장관들 가운데 부정을 저지르거나 부패한 사람이 있으면 『당장 감옥에 가두라』고 했던 이 박사가 그냥 있을 리 없었다.
이 박사는 곽 경무관을 불러 『자네가 큰 재산을 모았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으면서 불같은 화를 냈다. 이박사의 신임을 얻고 있던 곽씨는 물론 이리저리 둘러대어 사실과 다르다고 변명했다. 곽씨를 믿는 처지였던 이 박사는 그대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이 박사에게 변명을 하고 나온 곽 경무관은 비서실에 내려와 『어떤 놈이 각하에게 고자질을 했느냐』고 소리를 지르면서 야단을 피운 일이 있다.
곽씨는 당시 정치「깡패」로 이름난 임화수·이정재 등을 앞세워 재산을 모았다.
이런 부패상말고도 비서실이 얼마나 어지러웠는가는 암호책 분실사건이 잘 설명해준다. 「4·19」를 전후하여 경무대와 재외공관간에만 사용했던 암호책이 없어졌는데 한동안 없어진 사실조차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암호책은 미국대사관에 넘어가 있었다. 경무대 비서 중에 미국 측과 내통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계속>

<편집자주> 김상래씨의 얘기는 96회로 끝내고 우제하씨가 다시 맡습니다. 이 박사의 가장 가까운 친손인 우씨는 이박사가 하야할 때 이를 지켜보았고 이 박사가 서거할 때까지 주위에서 보살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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