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고승 10인(3)-김동화<동국대대학원장·철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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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 민족은, 제 선조를 존숭할 줄 모르고, 제나라 문학를 아낄줄 모르는 습성이 아마도 전통이 된 것 같다.
현대에는 아무리 구해보려야 구할 수도 없고 만들려야 만들수도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외국사람들이 이를 지중하게 보고 아껴 칭찬해 주는 것을 볼 때, 실로 얼굴이 뜨거울 때가 여간 많지 않다.
이제 겸익율사의 일만해도 다만 백제 한나라에 한한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 개국이래 처음 있었던 일대 장거였음에도 국가의 정사상에 언급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요, 불교사적에도 별로 나오지 않고 있어 한심할 따름이다. 그러나 역시 외국의 사료에 확실히 드러난 일이니 어찌하랴. 국내 문헌인 『미륵불광사사적』 이란 단편에는<백제 성명왕 4년 병오(서기526년)에 사문 겸익이 시심으로 율을 구하여 항해해서 중인도 상가나대율사에 이르러 범문을배우기 오재하여 축어에 동효해서 율부를 심공하여 계체를 장엄하였다.
그리고 범승 배달다삼장으로 머불어 범어 원본 아비담장과 오부율문을 가지고 귀국하였던바 백제왕은 우보고취로 교외에서 맞게 하여 흥륜안거케 하고, 국내의 명석 28인을 소집해 겸익으로 더불어 율부 72권을 번역하니 이것이 백제 율종의 비조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낭욱·혜인 두법사는 율의 소36권을 써 왕에게 바치니 왕은 비담과 신율의 서를 썼다>고도 했다. 따라서 우리는 선주의 한사람이 민족의 정신문화를 지도하기 위해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그야말로 「거자성백 귀무십」의 구법행을 하였다는 장거를 알수있다.
후세 신라시대엔 몇 사람의 인도 구법행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불귀의 손이 되고 말았다.오르지 혜초 한분은 갔다가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 돌아온 곳이 중국이요, 신라는 아니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고구려·백제를 통틀어 최초의 인도왕환사이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때 중국에서 십송률은 406년, 사분율은 411년, 마가승지율은 416년에 각각 한역돼 있었으니, 이미 백제에도 이들 제율부가 전해졌을 것인데, 겸익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인도에 가서 불경을 직수입하려 노력한 것이었다.
인도에 직접 가서 오부파의 율을 구해다가 그것을 72권의 단일본으로 번역, 종합하였다는데 겸익의 공로가 더한 것이라 생각된다.
중국에서 번역된 오부율은 서로 달라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항상 흡족치 못하게 생각하다가 원본을 구하려고 먼길을 띠났던 것이 구해와서는 이것을 종합한 것이 틀림없다. 낭욱·혜인 두법사가 소를 썼다하니 만약 그것이 현존하였던들 겸익의 장거에 관한 여러가지 의문을 풀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율과 함께 아비삼장, 즉 소승의논부, 다시말해서 소승불교의 철학집까지도 전래하였다 하니 백제의 불교사상 내용을 한층 더 풍부하게 한 동시에 중국불교에 의존하던 태도를 버렸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겸익율사에 의해 개종된 백제의 율종은 그당시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권위가 있었던 모양이니 그 증거로서는, 『일본서기』 21권에 의하면 서기 588년에 소아마자의 숙우가 백제승등을 청해서 수계하는 법을 물었다하였고, 또 선신둥 세이승은 3년간의 백제유학, 즉 율종지의 수학을 마치고 서기 590년에 귀국하여 율의종지를 전했다하니 백제율종의 권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동시에 이는 겸익율사의 율종개종의 사실을 방증하는것이라 할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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