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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게 재배한 쌀·수수와 통밀 투박하지만 깊은 맛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 알갱이가 충실한 밥을 씹는 것처럼 즐거운 일도 없다

사람들은 밥을 먹는다. 아니, 아시아인들은 밥을 먹는다. 그중 중국 북부 지방과 일본·한국에서는 단립종(쌀알 길이가 짧은 종자)인 자포니카 쌀로 지은 밥을 먹는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지리산 자락 밑 구례의 작은 마을에서 화학비료나 농약을 치지 않고 재배한 벼가 생산한 쌀로 매일 밥을 먹는다. 2년 전부터 말이다.

나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마트나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적당한 가격에 팔리는 쌀을 사먹곤 했다. 워낙 일상적인 일이었던 터라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재배한 곳, 도정 후 보관기간 등에 따라 밥의 맛이 달라진다는 사실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생활은 그런 것을 따져볼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신없음이 싫어서 통영으로 내려온 후 섬진강 건너에서 땅을 일구는 한 농부를 만났다.

살자고 짓는 농사 때문에 죽을 뻔
그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논을 많이 갖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고 열심히 농사를 짓다가 생명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벌레를 잡기 위해, 잡초를 없애기 위해 뿌리던 약이 너무 독했던 탓이었다. 살고자 짓는 농사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을 다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벌레를 쫓아내고 땅을 살찌우고 열매를 단단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기 시작했다. 재료는 모두 산과 들에서 나는, 이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잡초들과 열매들이 주를 이루었다.

덕분에 그는 건강한 농부가 되었고 그가 재배하는 작물 역시 건강했으며 자녀 중 딸 하나와 아들 하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비전을 찾아 농부가 되기로 결심해 함께 땅을 일구고 있다. 우리 식구는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낸 쌀과 잡곡으로 밥을 지어 먹고 있다. 물론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는 비싸지만 우리 부부가 먹었던 어떤 쌀보다 차지고 윤기가 가득하며 오래 보관해도 제맛이 오래간다. 그래서 밥을 먹는 일이 더욱 즐거워졌다. 맛이 좋은 밥을 먹을 때마다 농부가 이 쌀을 수확하기까지의 노고에 대해 종종 생각하게 되었다. 매일 먹는 것이라면, 그래서 일상적인 일이라면 더욱 소중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와 아내는 그 농부의 쌀로부터 배웠다.
올해는 그 쌀을 사러 지난해보다 늦게 구례엘 갔다. 아기를 키우기 시작하다 보니 아무래도 움직이기가 쉽질 않았던 탓이다. 그래도 지리산 밑자락의 가족들은 나를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그동안의 안부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20㎏짜리 쌀 한 포대와 10㎏짜리 현미 한 포대를 차에 실었는데, 조금 열린 창고의 문틈 사이로 말려놓은 줄기가 보였다.

“올해 수수 농사를 처음 지어봤어요. 근데 벌레가 참 많이 꼬이더라고요. 우리야 우리가 만든 제제만 쳐서 그랬는지 몰라도 작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찾는 분들이 많아서 손해는 안 봤는데, 아버지는 그냥 나락(벼) 심는 게 낫겠다 하시대요. 내년에 또 심을랑가 어떨랑가는 아직 몰겠네요.”

벌써 다 팔리고 얼마 남지 않은 수수를 퍼주던 젊은 농부는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 인사를 하기 위해 단감 포장 작업을 하고 있던 가족들에게 찾아가자 내게 대뜸 감이 잔뜩 들어 있는 박스를 내밀었다.

“점이 좀 백히고 모냥이 쪼까 안 좋아도 맛은 그렇잖응게 갖고 가서 애엄마 줘요.”

젊은 농부의 어머니는 푸근하게 웃으며 내 등을 떠밀었다. 트렁크에 잔뜩 실린 것들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은 무게감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향하려다 잠시 구례 오일장에 들렀다. 마침 장날이기도 했거니와 그곳에 이색적인 가게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2 귀촌인들의 장터 구례댁 3 쌀을 퍼주려는 젊은 농부 4 왼쪽부터 통밀, 수수, 백미

구례 장터 핸드드립 커피의 맛
“서울이랑 가까워서 그렇죠 뭐. 빨리 가면 2시간 반이면 가니까. 순천도 바로 옆에 있고. 구례가 생활하기 좋아요.”

오래된 장터에 어울리지 않는(?)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주던 아저씨는 구례에 귀촌 인구가 많은 이유를 지리적 조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요? 구례에서 만난 사람 셋이서 뭐 해볼 만한 거 없을까 싶어서 만든 거예요.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서 제출을 했더니 군청에서 시장에다가 공간을 만들어 주더라고요.”

구례댁. 원래 살고 있던 곳을 떠나 구례에 정착한 사람들이 재배하거나 만든 것들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공간. 책도 빌릴 수 있고, 오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을 수도 있는, 어찌 보면 굉장히 이질적인 공간이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꽤나 정성을 들여 커피를 내린 아저씨는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했단다. 구례까지 오게 된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묻는 것은 그만두었다. 나 역시 “어쩌다 통영에서 살게 됐어요?”라는 질문만큼 귀찮은 게 없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절감한 터였으니까. 그래서였는지 아저씨 역시 내가 서울에 살다 통영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에 그저 빙긋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어떤 질문도 없었다.

아직은 정돈되지 않은,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있을, 그리고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릴 법한 곳에서 아저씨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지난 여름 도정한 통밀을 사서 나왔다. 이 역시 쌀과 함께 밥솥에 넣어 먹을 것이었다.

잡곡밥처럼 삶에도 정석은 없는 법
집에 돌아와 구례에서 사온 것들을 풀고 정리한 후 다시 꺼내 한데 모았다.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이 수확한 쌀과 수수, 농사를 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사람이 수확한 통밀을 한데 놓고 보고 있자니 삶에 대해 새삼스레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잡곡밥을 지으려다 보니 더욱 그러했는지 모르겠다.

백미와 잡곡을 섞는 데에는 정석도 없고 황금비율도 없다. 그저 짓고 먹는 사람의 입에 맞으면 그게 가장 맛있는 밥이 되는 법이다. 삶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남들이 무어라 해도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그 모습이 낯설고 투박해 보여도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곱씹을수록 고소하고 달큰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잡곡밥처럼 조금은 다른 생각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역시 조금 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모두 저마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 나는 믿는다. 게다가 그 삶이 정직하고 스스로에게 충실하다면, 그래서 내가 구례에서 사온 이런저런 곡식처럼 깊은 맛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갓 지은 잡곡밥을 앞에 두고 확신했다.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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