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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와 범속의 조화|청전의 부음을 듣고 회고해본 그의 업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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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청전 이상범의 본격적인 평가는 75세로 세상을 떠난 지금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만, 살아서 고전이 된 그의 경우, 그의 예술과 인생이 어느 정도 미술사적으로 정리되었다고 본다.
1897년9월21일 극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청전 화백은 스스로의 힘으로 예술에의 길을 걸었고, 그 외롭고도 긴 행로를 굳건한 의지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평생을 걸어왔다. 마침내 독보적인 높은 곳까지 올라 한국 근대 회화 상 하나의 형식을 마련한 청전은 틀림없이 현대 회화의 한 고지를 이루었다.
작달막한 키에 재기가 넘쳐흐르는 그의 모습에서는 위대하다는 인상보다는 경쾌한 느낌이 앞선다. 그는 우직한 민중의 지혜를 선천적으로 몸에 지니고 있기에 그와 같은 기지와 재기가 넘쳐흐르고 있다. 평생 자신의 무학을 「콤플렉스」처럼 여겨왔지만, 오히려 청전의 경우에는 섣부른 교육의 결여가 오히려 순박한 심성으로 예술화되었는지 모른다.
사람을 대할 때 아무 격의도 없이 전인적으로 털어놓고 그 무방비의 인간 심정 속에서 진실을 이야기 할 때의 청전은 노경에 접어들면서도 천진 무구한 천사와도 같았다.
이 같은 그의 맑은 모습과 더불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그의 수많은 우수한 이야기들이다. 「사각뱀」「웃는 호랑이」「하루살이」 등등 그에게서 이 이야기를 되풀이 들었건만 들을 적마다 지리 하지 않고 새 맛이 난다. 아마 그의 표현의 묘미가 이야기의 줄거리 보다 앞선 것 같다.
언제인가 청전의 예술을 평가할 때 『한국의 민중적 미의식이 가장 고귀한 형식을 타고 표현된 미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민예가 갖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한국미가 바로 청전이 세워놓은 예술의 형식에 따라 영원화 되었다는 것이다. 청전이라는 예술가 속에서 고귀와 비속이 고요한 균형을 잡고 조화의 상태를 보여준 셈이다.
청전 예술의 정식화에 대하여 그의 다양성의 부족 때문이라고 논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원래 예술가에게는 변모 속에서 미의 가상을 외향적으로 추궁하는 형이 있는 반면에 안착과 내부 지향으로 미의 원형을 세우는 두 가지 형이 있다. 물론 청전은 후자에 속한다.
예술가로서의 청전의 도정은 크게 나누면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선농」이란 아호를 가지고 있던 서화 미술원 심전·소림 등 문하에서 공부하던 시절이다. 즉 10대·20대의 수련기이다. 제2기는 「청전」, 즉 「청년심전」이라는 호가 생기고 나서 이른바 심전형에서 벗어나 선전이나 서화 협회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시기이다.
제3기는 1945년 이후 1960년까지의 그의 가장 무르익은 황금기. 그리고 제4기는 신병과 싸우면서 고독한 만년을 지낸 시기이다.
제1기의 작품은 물론 수련기였기에 의욕이나 기술이 힘차고 날카롭다. 그러나 자기 「스타일」이 아닌 심전 및 소림조의 작품이다.
제2기의 초기는 남화적인 정서를 수묵담채 속에 풍기는 산수화로 점점 자기의 예술 형식을 모색하다가 결국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제2기의 후기에는 천박한 일본화에 빠지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피상적인 관찰과 가벼운 물상의 존재감 등 선전 후기의 작품들은 이러한 작품들이다.
제3기는 8·15 광복, 6·25 동란 등 많은 역사적 사건이 개재돼 있었으나 예술가인 그는 이와 같은 역사 의식을 예술에 전용하여 격조 높은 예술 형식을 만들어내었다.
그 「격조 높은 예술 형식」이란 크게 보면 남화적 정서의 현대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청전이 만들어 낸 자기의 예술 형식인지도 모른다.
대개 수평 구도이다. 수평으로 움직이는 운동 감각을 붓의 허리로 문질러 물질감을 나타내고 한국의 야산이 갖고 있는 온갖 목가적인 풍물 시를 조형적으로 노래 부르고 있다.
제4기는 1960년 이후 고독과 신병과 싸우면서 그의 말대로 덤으로 살고 있던 시절이라 이때에는 오른손의 마비가 왔는데도 단 하루도 붓을 쉬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손의 힘이 없어서 필력이 감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에 만년의 작품은 단순화한 묘법이나 하늘의 처리가 그 전의 것에 비하여 손색이 있다.
그렇게 보면 청전 이상범은 일생 개인전을 한번도 갖지 않고 산수화만 그린 전형적인 이조 풍경화의 마지막 보루인지도 모른다.
그의 한국적인 해학이며 지혜는 곧 이조 서민의 그것에 직결되는 것이기에 나는 감히 최후의 이조 산수화가라고 부르고 싶다.
이경성 <홍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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