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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6·25 21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아이크 집권과 내한(1)|등장의 배경(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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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43년9월5일, 구주연합군 사령관 드와이트·아이젠하워 원수는 UPI통신(주=UPI의 전신)의 바질·핑크리 기자로부터 놀날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종군 특파원인 핑크리 기자는 지중해의 연합군이 아프리카에서 독·이군을 격파하고 시칠랴 도를 석권, 이어 이태리 본토 남단에 상륙한 후에 승전 사령관인 아이크에게 상륙 성공을 축하한 후 느닷없이 미국의 전통적인 관례에 비추어 빛나는 무훈을 세운 군대사령관이면 누구나 의당 대통령직의 적격자로 간주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제부터 아이크도 장차의 대통령 감으로 국민의 주시를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핑크리 기자의 이와 같은 말은 그때는 아이크에 대한 낯간지러운 일종의 아첨으로 생각됐지만 10년 후에 현실로 나타났다.
또한 핑크리 기자도 무턱대고 그런 예언을 한게 아니고, 그는 공훈을 세운 장성이 정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 과거 미국 정치사의 여러 사례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조지·워싱턴(초대), 앤드루 잭슨(7대), 윌리엄·헨리·해리슨(9대), 재커리·테일러(12대), 율리시스·S·그랜트(18대)의 제 대통령은 모두가 군장성 출신이었다.

<나토사령관 임명으로 제동>
그리고 조지·B·매클러런과 윈필드·스코트·핸코크 두 장군도 선거에서는 졌지만 둘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지명을 받았고, 근대에 와서는 미·서 전쟁 때의 쿠바 주둔 미군 사령관 래너드·우드와 제 1차 대전 때의 유럽 파견 미군 사령관 존·J·퍼싱 두 장군이 국민으로부터 정계 출마를 간청 받은 적이 있었다. 핑크리 기자의 말을 듣고 아이크는 사뭇 놀라고 어리둥절했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자기와 정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이크가 두번째로 정계 출마 의사를 타진 받은 것은 나치가 패망한 직후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였다. 「포츠담 회담」참석차 베를린에 들른 트루먼 대통령은 오머·브래들리 대장(당시 계급)도 동석한 자리에서 아이크에게 1948년의 대통령 출마를 포함한 정계진출에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제의하였다. 이때 트루먼이 아이크를 민주당 후보로 끌어들이려고 그런 제의를 했는지, 혹은 그저 막연한 호의에서 그랬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때에도 아이크는 대통령 제의에 사의를 표하면서도 정계에 나설 생각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후 아이크는 유럽으로부터 돌아와 마셜 후임으로 1945년12월부터 48년2월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는 군복을 벗고 컬럼비아 대학 총장에 취임하였다. 4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은 끈질기게 아이크 옹립을 꾀했지만 실패하자 토머스·튜이 지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민주당 일부에서 후보로 내세울 운동을 전개하여 난처한 입장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48년 선거에는 아이크 자신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채 트루먼과 듀이가 대결했는데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전자의 승리로 끝났다.
듀이 패배 후 공화당에서는 52년 선거에 대비하여 더욱더 아이크 유인 공작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그이 외에는 20년간의 민주당 집권을 꺾을 후보가 없다는 생각이 차츰 공화당 안에 감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에 아이크의 정계 진출에 브레이크를 거는 일이 생겼다. 트루먼 대통령이 크를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 군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 조치는 아이크로서는 달갑지 않았던 모양으로 그의 회고록(The White House Years, Mandate For Change 1953∼1956)에는 이때 일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유럽의 사태 때문에 나의 컬럼비아 대학 총장직은 짧은 기간에 끝나게 되었다.
50년12월8일, 오하이오 주로 가는 침대차에서 나는 대통령으로부터 나토 군사령관으로 임명됐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대통령은 유럽의 긴박한 정세를 설명한 후 나토 가맹제국이 군사령관으로 나를 선출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학 총장직에 미련 두고>
과연 내가 이것을 수락해야 할 것인가? 솔직이 말해서 나는 대통령전화를 받고 실망하였다. 나 자신이나 아내는 대학 총장직에 무척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생활 환경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평소에 나토 구상을 지지하고 서구문명의 장래는 이 기구 성패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더우기 나토 가맹국들이 최고 사령관으로서 유럽을 잘 알고 있고 2차 대전 중 연합군을 지휘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승리와 연상되는 군인을 택하고 싶어하는 심경도 나에게 이해가 갔다.
어쨌든 나는 당시 여전히 육군장교(주=종신원사)였기 때문에 미군 최고 사령관이기도 한 대통령이 다른 군인보다 내가 그 임무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제의를 받아들일 도리밖에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단지 상관명령에 복종한 예에 불과하였다. 이 명령은 요청이란 형태이긴 했지만 자기 상관의 명령 이외의 다른 것으로 해석하는 군인은 미국 군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젠하워 원수가 군복을 다시 입고 나토군 최고 사령관으로 파리에 부임한 후에도 공화당은 그의 후보 옹립을 늦추지 않았다.
유럽을 방문하는 여러 공화당계 정치가와 단체 지도자들이 그의 출마를 종용했고 이와 함께 같은 취지의 진정서와 서한이 아이크 앞으로 답지했다. 처음에는 고사하던 아이크를 정계 진출로 번의시키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헨리·캐보트·로지 상원의원의 조리 있는 설득이었다. 아이크의 오랜 친구이기도한 로지 의원은 미국의 정치사로부터 시작하여 현 내외정세에 이르기까지 사태를 분석 설파하고 구국의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크가 나서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즉 5회에 걸친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한 현 정치 정세가 계속된다면, 실질적으로 미 국가 제도에 불가결한 양당제가 무너진다고 로지는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공화당은 에이브러햄·링컨(16대)이나 디어도·루스벨트(26대) 대통령이래 계승돼온 당의 기본 신념을 지지하면서 당선되어 현 정권의 중앙집권과 무책임한 지출 경향을 시정하는 동시, 고립주의의 결정적 과오를 피할 수 있는 인물을 지명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아이크 밖에는 없다고 역설하였다. 52년1월부터 뉴햄프셔 주를 효시로 하여 각주에서 예비선거 준비가 시작되자 아이크도 출마 여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태프트와 경합, 신승>
이해 2월16일에 그는 드디어 공화당 후보로 출마를 응낙하고, 6월1일에 귀국하여 본격적인 지명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역시 군인이라 일단 결단한 후에는 과감한 행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아이크가 정계 출발을 결심하고, 발벗고 나섰지만 공화당 후보 지명을 받기까지는 큰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그것은 당내에 도사리고 있는 로버트·태프트를 우두머리로 하는 고립주의적인 직업정치가들 벽을 뚫어야 했다. 태프트 자신이 오래 전부터 조직적으로 후보지명 획득 공작을 벌였기 때문에 일반인기는 절대적인 아이크도 당내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52년7윌7일 덴버시에서 개척된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아이크는 간신히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제1차 지명 투표결과는 아이크 5백95표, 태프트 5백표, 워런 81표, 스타센 19표로서 아이크가 지명 획득에 9표 부족했으나 스타센의 19표가 돌아오는 바람에 겨우 태프트를 누르고 승리하였다. 아이크로서는 백악관을 향한 제 1차 관문은 겨우 통과한 셈이었다.
한편 공화당이 2차대전의 국민적 영웅인 아이크를 옹립하여 재빨리 선거 전열을 가다듬은데 반해, 민주당은 처음부터 보조가 맞지 않았다. 이런 혼선은 당연히 또 나오리라고 기대했던 트루먼 대통령이 재출마를 단념한데서 비롯됐다.
사실 이때 민주당에는 트루먼 만한 강력한 지도자는 없었다. 준법상 재출마가 가능한 트루먼이 왜 이를 포기했는가는 그의 회고록(Memoris by Harry S. Truman)에 다음과 같이 그럴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52년의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1949년1월21일 나의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날에 결심한 것이었다. 4년간의 대통령임기를 앞둔 자날 나는 우리 나라와 이 세계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검토해 보았다.
나의 생각은 내 장래와 대통령직에 얼맛동안 머물러 있어야 하는 문제, 그리고 리더쉽의 끊임없는 쇄신을 바라는 국민의 요구까지 미쳤다. 그때 나는 다시는 대통령으로 입후보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혀 놓았다. 그러나 이 결심은 아무에게도 알릴 수가 없었다. 대통령의 직책상 이것은 마지막 단계까지 비밀로 해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950년4월16일에 나는 비장해둔 비망록에 「민주당대회의 대통령후보 지명에 입후보하지 않겠다」고 적어 두었다.

<트루먼, 재출마 포기 고수>
나는 제1차 대전 때 2년간 군에 복무했고 10년간을 상원의원으로, 그리고 두달 20일간을 상원의장과 부통령으로 지냈다. 나는 30년 이상을 줄곧 공직에 있었고 1945년4월12일 별세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합한다면 두 차례의 임기동안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재직한 셈이었다. 워싱턴, 제퍼슨, 몬로, 매디슨, 앤드루·잭슨, 우드로·윌슨, 칼빈 쿨리지 등 모두가 두 임기만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선례를 지켰다. 다만 스랜트, 디어도·루스벨트가 이 선례를 깨뜨리려고 시도했는데 프랭클린·루즈벨트만이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선례야말로 헌법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에 경의를 표하기 위한 관습에 따라 계승되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대통령으로서 8년은 충분하며 때로는 어떤 한사람이 그 직책에 8년 머무르는 것도 길다고까지 느꼈다. 재 출마하면 당선되어 프랭클린·루스벨트의 선례를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는 안된다고 결심하였다.』
주요일지(1951년10월20·21·22일)
※10월20일▲금성동 남방서 격전 ▲공산측, 개성·판문점·문산간 도로 양측에 너비 4백m의 중립지대 설치안에 동의 ▲공비소탕을 위하여 백선엽 전투사령부 설치 ▲한·일 예비회담개최
※10월22일▲F-86제트기, 미그6대 격추 ▲애급 총동원령
※10월22일▲미군 탱크 대, 금성에 재돌입 ▲유엔 군 사령부, 휴전회담 재개승인 ▲콘린즈 미 육군 참모총장, 사이공 방문 ▲소련, 제3차 원폭실험 성공
※알림=멀지않아 6·25의 아군 『유격·첩보작전』을 다룰 계획이오니 관계 입사는 서신이나 전화로 연락해주시면 감사하겠읍니다.
▲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 전화는(28)8211(교환)의 74번, 일요일과 야간은(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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