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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제26화 경무대 사계(7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프란체스카 여사>
대동아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니까 지금 생각하면 1932년이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할아버지로부터 소포가 도착했다. 거기서 이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결혼 사진이 나왔다. 서양 사람을 처음 보니 사진조차 신기했다. 그때만 해도 눈이 오목한 외국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집안에서 말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할아버지의 재혼을 알았다.
어른들이 박 할머니에게는 이 얘기를 하지 말라고 쉬쉬했던 생각이 난다.
후에 할아버지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있던 1929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세계 군축회의가 열렸다.
그때는 일본이 만주 사변을 일으켜 중국대륙을 침략할 기운이 무르익던 뒤숭숭한 시기다.
이 박사는 누구의 초청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우리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일본의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을 폭로하고 우리를 도와달라기 위해 제네바에 갔다.
레만 호반에 있는 루시·호텔에 묵으며 각 국 대표를 만나 독립을 호소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조반을 들려는데 앞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젊은 여인과 어머니가 눈에 마주쳤다.
이 박사는 곧 그 자리로 건너가 자기 소개를 했다고 한다.
그 젊은 여인이 도나·프란체스카였다. 젊은 프란체스카에게는 동양인이 홀로 서양에 와 독립운동을 한다니 무척 로맨틱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두 모녀는 이 박사와의 합석을 제의해 그 자리서 같이 아침을 들었다. 그 후 이 박사와 젊은 여인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프란체스카는 홀로 와 있는 이박사의 타이피스트 일도 해 주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의 조국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때인 만큼 더 급속히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이 박사는 군축회의가 끝날 때까지 오랫동안 이곳에 묵었는데 두 분의 사랑은 무르익어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이 박사는 두 모녀를 오스트리아로 떠나 보내고 미국으로 오면서 『내가 미국에 가 결혼준비를 하고 연락할테니 오라』고 약속했다.
이 박사는 하와이로 돌아와 친지들에게 결혼계획을 털어놓고 이해를 구했다. 처음에는 서양사람과 결혼한다고 해서 반대가 상당히 거셌다고 한다.
『상대자가 비록 오스트리아 여자라곤 하지만, 집안이 좋고 5개국 말을 하는 사람이니 내 비서로도 좋지 않소.』-이 박사는 꺼리는 교포들에게 이런 말로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반대를 하던 사람들도 이박사의 결심이 굳으니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오히려 많은 교포가 결혼준비를 도와주었다. 독립운동이란 본무를 해가면서 결혼을 추진하려니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1932년에야 결혼 준비가 모두 끝났으니 미국으로 오라는 편지를 프란체스카에게 보냈다.
두 분은 뉴요크에서 만나 그곳 한인교회에서 이병직 목사 주례로 결혼했다.
귀국 후도 그렇지만, 마담의 이 박사에 대한 정성은 미국 시절에도 지극했다고 한다.
이병직씨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박사가 강연을 갔다가 하오 5시에 돌아오기로 했던 것이 늦어져 밤 12시에 돌아온 일이 있는데 그때까지 식사도 않고 응접실에서 초조히 기다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할머니는 24시간 동안 할아버지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비서들에게 자주 『Before your president, he is my husband.(대통령이기 전에 그 분은 내 남편야)』란 말을 하며 걱정되는 얘기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오 3시쯤에 담화나 지시사항을 구술 받는 비서들은 대통령이 마담이 보낸 사환애한테서 종이에 싼 드로프스 두 개를 받아 입에 넣고 『이게 바로 내가 지금 원하는거야』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곤한다.
경무대에서 대통령 식사는 모두 마담이 직접 감식을 한 뒤 대통령께 드렸다.
하오 5시만 되면 규칙적으로 정원산책을 하는 것도 마담의 권유 때문이다.
마담은 주위사람들로부터 최고의 비서며 간호원이라는 평을 받았다.
정부 수립하기 전 이 박사가 어떤 서류를 찾으면 비서들은 못 찾아도 마담은 금새 찾아오곤했다. 할머니는 또 할아버지의 건강, 기분에 너무 유의를 해 주위사람들이 대통령이 기분 나빠 할 일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자라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인지 우리가 좋다는 한방 보약에는 질색이었다. 강원도에서 캔 산삼이 진상돼온 일이 있었는데 마담이 위생에 나쁘다고 반대해 한참 동안 달여드리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이 『녹용이나 삼이 한국사람에게 좋은 것』이라고 하면 마담은 『저분은 외국에서 오래 살아 위장이 서양 사람같이 돼 안 맞는다』는 억설을 하기도 했다. 경무대 초기에 김홍식 비서가 용을 달여 대통령에게 드리려다 마담에게 들켜 『이 집 살림은 내가 하는거야』하고 크게 호통을 들었다. 후에는 마담도 용과 삼이 좋은 걸 알았다고 한다. <계속> [제자는 윤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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