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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제26화 경무대 사계(7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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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집안과 친척>
이 박사는 황해도 평산의 군량굴이라는 곳에서 양녕대군의 후예인 이경선공의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세 살 때 서울로 이사해와 남대문 밖 고동과 동대문 밖 홍수동, 즉 지금의 창신동에서 자랐다. 이 박사의 두 손위 누님 중 큰 누님은 연백의 우씨 가문에, 작은 누님은 심씨 가문에 출가했다. 나는 우씨 가문에 출가한 이 박사 큰 누님의 손자가 된다.
이 박사의 고향이 군량굴이라 우리 동네에서는 내 할머니를 군량굴 댁이라고 불렀다. 이대통령 친척이라곤 큰 누님으로부터 내 부친인 우종구씨와 작은 누님에서 심종철씨의 두 생질과 그 가족이 있을 뿐이다.
나는 어려서 연백의 고향에서 할아버님으로부터 『할머니의 동생 되는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있다』는 얘기를 가끔 들었다. 그리고 30년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1년에 서너 번씩 편지와 돈이 오곤 했다. 봉투에 영어가 기재돼 번역하러 영어 아는 사람을 찾아가곤 하던 기억이 난다.
대개 할머님 생신과 추석·섣달그믐께 돈이 왔던 기억이다.
미국에 계신 할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오는 날이면 순사들이 달려와 편지 내용을 알아가곤 했었다.
할아버지와 편지왕래가 있던 무렵 키가 작고 얼굴 왼편에 푸른 반점이 있는 부인이 우리 집에 가끔 들렀다. 이 박사의 부인이던 박승선 할머니다.
박 할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는 내 부친에게 『외삼촌한테서 편지왔느냐』고 이 박사 소식을 캐물었다.
이 박사는 1912년 두 번째 미국으로 떠날 때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박 할머니와는 『내가 언제 돌아올 기약이 없으니 헤어지자』고 해서 사실상 이혼을 한 사이이기 때문에 일체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박 할머니는 이 박사가 미국으로 떠난 후 기독교인이 되어 신학공부를 했다. 이미 그 때는 해주·원산·진남포·평양 등지에서 전도사를 하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내 아버님한테 『혼자 살 수가 없어 아들을 하나 정해서 의지하고 지낸다』는 얘기를 했다. 양자를 한 아들은 목수라고 했다.
박 부인과의 사이에서 이 박사는 태산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 박사가 망명한 후 하와이에 자리를 잡았으니 선교사 편에 보내라고 해 배를 타고 하와이에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홍역을 앓다가 그곳서 죽었다.
이 박사는 1912년에 미국으로 가면서 내 아버님을 미국으로 데려 가려고 하인 편에 말을 보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박사의 매형인 내 조부께 이 박사는 『종구를 미국에 데려가 공부도 시키고 독립운동을 같이 할테니 머리를 깎아 서울로 보내달라』는 편지를 했다.
이 편지를 본 조부께서는 『아니 저나 개명했다고 머리를 깎았으면 됐지. 남의 종손까지 머리를 깎는 상놈을 만들겠단 말이냐』고 노발대발하며 거절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박사는 집에서 어릴 때 정혼한대로 박승선 부인과 결혼은 했지만 별로 두터운 정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7년 간 옥살이를 하다가 미국에 건너가 박사학위를 따고 1910년에 돌아오니 박 부인이 그동안 1천2백2평짜리 앵두 밭을 절에 시주해 이 박사로부터 큰 노여움을 받았다.
우리가 알기로는 이 일이 박 부인이 소박을 받게된 표면적 동기다.
할아버지는 이미 배재학당에 다닐 때부터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절에 앵두 밭을 시주한 것에 특히 격노했던 것 같다. 당시 이씨 가문의 재산은 창신동에 3백40평 대지의 집과 1천2백71평의 밭, 69평짜리 땅과 그 앵두 밭이 있었다.
내가 이 박사를 처음 뵌 것은 환국 직후 조선호텔에 계실 때다. 나는 그때 조선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 박사가 환국했다는 벽보를 보고 다음날 가족사진과 이 박사가 우리 집에 보낸 편지를 갖고 조선호텔에 갔다. 정문에서 미군MP가 제지해 편지를 보였더니 봉투에 쓰인 영어를 읽어보고는 들어가도 좋다고 했다. 조선호텔에 들어가 윤치영씨를 만났다.
『이 박사를 뵈러 왔습니다.』
『당신 누구야.』
『손자 되는 사람입니다.』
『이 박사 친척이 어디 있소.』
그래서 사진과 편지를 보이고 사정을 했더니 그것을 이 박사에게 보인 뒤 들어오라고 했다.
들어가니 백발 노인이 혼자 있어 큰절을 했다.
『자네 종구인가 제하인가.』
『예, 제하입니다. 할아버님 소식은 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와있었나.』
『얼마 전부터 서울에 와 있었습니다.』
『자주 찾아와. 오늘은 바빠』
그 후 자주 이 박사에게 출입을 했으나 뵙기가 쉽지 않았다.
박승선 할머니는 해방 때 연백에 있다가 이 박사 환국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서 정미소 하던 송 사장이란 분이 의복과 자동차를 주선해 줘 돈암장으로 이 박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비서들이 따돌렸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할아버지를 뵐 기회가 있어 『박씨 할머니가 오셨다가 못 만나 뵈웠다는데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박사는 『만나 봤으면 좋을걸 그랬지』하고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박 할머니의 행방도 모르겠고, 프란체스카 부인 문제도 있어 면접을 적극적으로 주선하지 못했다. <계속> [제자는 윤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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