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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하늘의 전쟁(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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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10전투비행전대>(2)
하늘의 사나이들은 찰나와 순간에 생사를 걸고 있다. 하늘에서는 생사의 엇갈림이란 종이 한 장 차이기 때문에 잠시도 방심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분초마다 생사와 대결하고 있는 전투조종사들에게는 기술·학식·체력·인격 등에 있어 거의 완전 무결이 요구되는 것이다.
김정렬 초대 공사교장이 교훈으로서 일류 공중 지휘관과 일류기술자와 일류신사가 되라는 것을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제10 전투비행 전대의 조종사들은 6·25를 겪으면서 모두가 한두 번 이상 사선을 넘었다. 이들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아슬아슬한 「드릴」과 함께 왜 조종사들에게 앞서 열거한 바와 같은 만능이 요구되는가를 쉽게 납득할 수 있다.
▲김두만씨(당시 조종사=소령·전 공군참모총장·예비역 대장·현 사업·45)<6월 27일 박범집 참모차장으로부터 임진강철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고 건국 호에 폭탄 10개를 싣고 나가 모두 투하했으나, 철로만 맞아 받침목이 파괴됐어요. 너무 저공으로 날았기 때문에 내가 투하한 폭탄이 터지면서 날아온 나무 조각과 돌멩이에 맞아 날개 밑이 곰보가 됐더군요. 대전서 충북 음성의 괴뢰군 포대를 폭격하러 나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여의도에서 단 2개 남은 폭탄을 이때까지도 가지고 있었는데 2개로는 포대를 폭격할 수가 없어 마침 대밭에 은닉해 둔 적 차량을 발견 코 때렸어요.

<연 이틀 피격 손상기 몰고 귀환>
명중여부를 확인하려고 선회하다가 옆 포대에서 쏘아 데는 포탄에 얻어맞았어요.
눈앞에서 불이 번쩍하더니 비행기가 휙 뒤집히려고 합디다. 전속으로 대전에 돌아와 보니 조종석과 연료 「탱크」사이를 포탄이 뚫고 나갔더군요. 다음날 진천에 출격했다가 또 혼이 났어요. 우글거리는 괴뢰군 집결지 위를 아주 저공으로 날며 위협했더니 일제히 소총사격을 가하대요. 바른쪽 다리가 버쩍 올라 오길래 보니까「페달」이 떨어져 나갔어요. 연료 「탱크」 옆도 벌집같이 얻어 맞았구요. 요는 경험부족에서 생긴 실수지요. 7월 2일에 대전서 영등포 쪽의 적정을 살피러 권성근 중위를 뒤에 태우고 출격하여 적「탱크」를 발견하고 36대까지 세고 나니까 포구를 치켜세우더니 일제히 쏘아 댑디다. 간신히 호구를 벗어났습니다.
나는 1951년 9월말에 강릉기지로 올라갔어요. 제10전투비행전대의 출격지역은 원산·신고산·창도리와 서쪽의 사리원·신계·곡산, 중부의 평원 선을 중심으로 한 적 보급로 등이었습니다. 신고산에 출격했을 때는 예상외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어요. 상오 9시쯤 목표지점에 도착해서 보니 적 차량이 계곡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폭탄을 제일 목표에 투하하고 재빨리 쫓아가 차량이 들어간 골짜기에 기총 소사를 가했더니 검은 연기가 치솟으며 불꽃이 충천해요. 바로 그곳이 적 연료 보급 창을 은폐해 둔 곳이었어요. 강원도 금화군의 창도리 계곡의 적 보급기지 폭격은 퍽 어려웠고 학생도 있었어요.
적은 좁은 계곡에 보급품을 적재, 은폐시켜 놓고 주위에는 대공화기를 밀집시켜 놓았어요. 우리 F-51 전투기가 창도리 계곡에 나타나기만 하면 적의 자동화기와 고사포탄이 요란하게 날아올라 옵디다. 한번은 내가 편대장으로 김금성 대위와 이일영 중위와 함께 창도리에 출격 나갔어요. 이날은 비행기가 3대밖에 남은 게 없어 우리 셋이서 편대를 짜고 나갔습니다. 공격을 마치고 나서 보니까 이일영 중위의 2번 기가 없어졌어요.「라디오」로 암만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혹시 먼저 갔나 싶어 강릉기지로 돌아가 관제탑에 물어 봤더니 안 왔다는 거예요. 나는 다시 김 대위와 함께 창도리에 돌아가 좁은 계곡을 샅샅이 뒤지며 찾아보았어요.
이 중위가 「라디오」로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착각도 듭디다. 결국 이 중위는 52년 1월 9일에 창도리에서 적 포화를 맞고 장렬한 전사를 했어요.
나는 강릉기지에 착륙하고서도 몇 시간 동안 정신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창도리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함께 출격한 요기를 잃은 슬픔은 당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지요.

<비행기 후미엔 탄흔 벌집처럼>
1월 중순에 나도 이 창도리 출격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요. 1번 기를 탄 나는 수직강하를 해서 「로키트」를 동굴 속에 쏘아 대는데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잠깐「블랙아웃」(실신) 상태가 됐어요. 곧 정신을 차리면서 나도 모르게 직감적으로『8G』(중력)를 걸어 올라오며 보니까 내 비행기는 산에 바짝 달라붙어서 소나무사이를 헤치며 지나가고 있어요.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지요. 「7·8G」만 걸었더라도 나는 그냥 산에 부딪쳐 버렸을 겁니다. 나도 모르게 잡아챈 G계기가 올라와 보니 8을 가리키고 있던거애요. 나는 정신을 차리고 요기들에는 공격 중지령을 내렸어요. 요기들은 계곡으로 강하할 생각도 못하고 위에서 빙빙 돌고만 있었는데 올라와 얘길 들어보니, 자기들은 아무리 봐도 전혀 내려갈 수 없는 좁은 계곡이더라는 거예요. 52년 1월 12일에 나는 1백 회 출격을 마치고 사천기지의 훈련교관으로 내려갔습니다.>
▲천영성씨(당시 제10전비전대 조종사=중위·현○○학교 부교장·준장·43) <52년 12월 원산출격 때 나는 간신히 사신을 쫓아 버렸어요. 원산 밑에 있는 괴뢰군 CP 폭격작명을 받고 미군 측에서 내려 온 사진을 보니 CP 둘레 사방에 적 고사포 진지가 구축돼 있어요. 출격 전 「브리핑」에서 그 주위의 양민들은 모두 철거했으니 무차별폭격을 하라고 합디다. 나는 제4편대의 4번 기를 몰고 나갔는데 앞 비행기들이 때려 놔서 벌써 불바다가 돼 있어요. 투탄 하려고 저공으로 내려가 보니 괴뢰군과 민간인들이 도망치는 게 똑똑히 보이대요.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 소사까지 마치고 고도를 잡는데「엔진」이 부르륵 거리기 시작해요. 「엔진」을 조정해서 간신히 동해로 빠져 기수를 강릉기지로 돌렸어요. 가까스로 착륙해 보니 비행기에는 별 이상이 없고 연료 「탱크」에 물이 좀 들어가 있더군요. 해금강의 적진을 공격할 때에도 죽을 뻔했어요. 이때 김금성 소령이 이끄는 편대의 2번 기를 타고 나갔는데 김소령 기는 수직으로 지나가 버려 옆으로 가던 내가 먼저 목표물을 발견했어요. 나는 즉시 수직강하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올라오는데 내 비행기에서 『탕』하는 소리가 납디다.
비행기에 이상이 없는 것 같아 다시「로키트」포를 쏘러 내려가다 옆을 쳐다보니 「프레임」에 구멍이 뚫려 있어요. 그것을 보니 머리칼이 곤두섭디다. 다가온 김 소령에게 「프레임」 피격됐다고 하니까, 보더니 괜찮다고 해요. 기지에 내려보니 비행기 뒷부분에 기관총탄이 벌집처럼 뚫고 나갔더군요.>
▲박용만씨(당시 조종사=소위·예비역 대령·현 KAL 조종사·43)<52년 2월 초순에 강릉기지에 올라가 관습비행을 겨우 1 회하고, 바로 적지에 출격했습니다. 나는 첫 출격서부터 62회 때까지 윤응렬 대위가 편대장인 편대의 2번 기를 몰았어요. 출격 5회까지는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 편대장기를 따라 다니기만 했어요. 그러다가 바로 6회 출격 때 그만 적의「미그」15를 만나 간이 콩알만해졌어요. 윤응렬 대위가 1번기, 내가 2번기, 정주량 대위가 3번기, 배상호 소위가 4번 기를 각각 몰고 해주 북쪽을 폭격할 때였어요.
상오 11시쯤 폭격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제2목표를 찾아 서서히 비행하고 있는데 3번 기의 정 대위가 일본말로 다급하게 『왼쪽으로 꺾으라』고 고함을 쳐요.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하고 급선회를 하고 보니 적의「미그」15기 2대가 공격해 오고 있는데 한대는 밑에서, 다른 한대는 위에서 우리 편대에 달려듭디다.

<전사전우 사진 걸고 백회 출격>
태양을 향해 보아서 그런지 검은 색이 나고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정말 머리가 쭈뼛했어요. 그러나 적 「제트」기는 우리를 더 쫓지 않고 순식간에 북으로 날아가고 맙디다. 정 대위가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큰일날 뻔했지요. 「프로펠러」인 우리 전투기와 「미그」「제트기」와는 맞설 수가 없는 거지요. 6·25전쟁 중 한국공군이「미그」를 만난 것은 우리 편대의 경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요. 52년 8월초에 92회 출격 때인데 박두원 중위와 함께 나간 일이 있어요.
그는 92회째 출격이었는데 나와 1백 회 기록을 같이 세우자고 나더러 이번만 나갔다가 며칠 쉬어 달라는 거예요. 그러자고 해 놓고 속초 앞 바다를 지나는데 그만 박중위 비행기에 매달고 가던 폭탄이 터져 기체가 산산조각이 났어요. 순식간에 둘도 없는 전우를 잃은 겁니다. 나는 기지에 돌아와 그의 침대를 잡고 한없이 울었어요.
내가 1백 회 출격을 나갈 때 박 중위의 사진을 조종석에 걸고 나갔습니다. 박 중위의 말대로 1백 회 출격은 비록 사진이나마 그와 함께 한 셈이지요.>
▲김만용씨(당시 제 10전비전대조종사=중위·현 ○○학교장·대령·41)<52년 10월에 원산에 출격했을 때 갑자기 「엔진」이 꺼져 크게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그대로 육지에서 버틸 것이냐 바다로 나갈 것이냐를 망설이면서 서둘러 「믹스처」를 조절하니까 용케도 「엔진」이 되살아납디다. 나는 이보다 앞서 당황한 나머지 무전으로 「이머전시」(비상)를 타전했는데 강릉기지에서는 일대소동이 났던 모양이예요. 착륙하니까 모두 얼싸안고 기뻐했지만 나는 몹시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은 편대군장 유치곤 소령을 뒤따르는 편대로 출격했어요.

<편대와 같은 고도서 포탄 작렬>
대개 출격횟수가 많지 않은 조종사들이었는데 폭격 제한 선을 막 넘어서니까, 적 고사 포가 터져 올라오는데 모두 바싹 긴장했어요. 적 포탄이 우리 비행기와 같은 고도에서 터지는데 이렇게 되면 정말 기분이 나쁩디다. 이것은 적이 이미 우리 고도를 측정했다는 증좌이니까 피격될 가능성이 많은 거지요. 이런 때는 고도를 서서히 잡으며 피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풋나기 조종사들은 당황한 나머지 심한 기동을 하게 되지요. 그러면 더 얻어맞기가 쉬운 겁니다. 전 소령은 앞서 나가며 왜들 안 따라 오느냐고 호통을 칩디다. 이럴 때에는 마음을 착 가라앉히고 편대군장이나 편대장 지시대로 따르는 것이 사는 길이죠.>
◆주요일지(1951년 10월 5·6·7일)
※10월 5일 ▲적, 철원지역서 반격 ▲B29 대동강철교폭격 ▲이 대통령, 육군종합학교 시찰 ▲북평방송,「유엔」군 측의 휴전회담장소변경제안을 거듭 비난 ▲「스탈린」, 최근 소련서 원폭 실험했다고 언명.
※10월 6일 ▲1백대의 미「제트기」, 1백 50대의 「미그」기와 공중전 ▲호지명군 새 공세.
※10월 7일 ▲공산군 측, 새 회담장소로 판문점 제의 ▲「딘」미 원자력위원장, 신 원자무기개발 중이라고 의회서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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