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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라면 누구나 「랑케」를 든다. 누구보다도 엄정한 객관성을 노렸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를 있던 그대로 그려내는 것을 역사가의 목표로 여겼다. 이를테면 역사를 서술할 때에는 일체의 가치판단을 삼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도 까놓고 보면 엄정한 객관성을 지켰다고는 할수 없다. 그가 명저 『근대사의 제시대에 대해서』를 쓸 무렵에는 민주주의에 그리 큰 호감을 갖지 않았었다. 민중에 의한 혁명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은 물론이다.
이 책은 원래는 1854년 가을, 「바이에른」의 국왕 「맥시시리안」 2세 앞에 두고 19회에 걸쳐서 행한 강의였다.
왕 앞에서 민주주의를 찬양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역사의 주조가 돼가고 있던 민주주의를 긍정치 못했던 것은 역시 그만큼 그의 시야가 좁았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그는 만년에 이르러 자기 사관을 적지 않게 수정하고 민중의 힘을 긍정하는데 기울어졌던 것이다.
한편 동시대의 「빅토르·위고」는 언제나 민중편에 서 있었다.
1848년, 2월 혁명 때 그는 「콩코르드」 광장에서 혁명을 부르짖는 민중 속에 서 있었다. 이때 어느 친구가 사태가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폭동이라면 진압되겠지만, 혁명이라면 성공할 것이다.』 이렇게 그는 대답했다.
그는 철저한 공화주의자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하여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그 나름의 가치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그가 엄정한 객관성을 지향했던 「랑케」보다는 역사의 흐름을 더 올바르게 봤다는 것은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위고」에게도 물론 한계는 있었다. 그는 작가다운 직관으로 2월 혁명이 혁명이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왜 혁명이 될 수 있다든지, 또 그게 왜 성공했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역시 그런 것은 역사가에게 맡겨야만 할 일일 것이다. 혁명과 같은 엄청난 일은 한 두 원인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방안을 다 수집해 놓은 다음에야 충분한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느 역사해석이나 한 세대가 지나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로인비」의 말도 단순히 객관성만을 강조하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오늘 4·19의 열두 돌을 맞는다. 역사가도, 작가도 숨죽이고 있다. 정치가들의 말만이 들린다. 냉정을 찾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좀더 방증을 얻기 위해서인지,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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