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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제26화>경무대 사계(47)황규면<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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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부산 피란>
정부가 대구로 옮겨진 후 낙동강전선은 적의 계속된 공세로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괴뢰군은 왜관·성주 등지에서 대구를 향해 집중포격을 가해와 문자 그대로 함락작전의 위험에 빠졌다.
이런 군사적 정세를 감안하여 이대통령은 8월18일 정부를 다시 부산으로 옮겼다.
국방부와 내무부를 제외하고 행정부는 대부분 부산으로 이동했고 국회도 부산으로 내려갔다.
전세가 점차 부리해지자 미8군사령관 「워커」장군은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국방부와 내무부도 부산으로 철수하라고 했다.
신 국방은 국방부를 부산으로 철수시키면서 조병옥 내무장관에게 내무부도 옮기라고 했다.
그러나 유석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대구사수를 주장하면서 「유엔」군에 배속돼있던 경찰 군을 지휘했다.
그는 『대구가 함락되는 경우에는 아무리 「유엔」군이라 하더라도 부산을 고수하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구철수를 반대한다』고 했다.
유석은 직접 「워커」장군을 찾아가 대구사수의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8군사령부도 부산이동준비를 끝내고 있었는데 유석의 설득에 「워커」장군도 마음을 돌려 『나도 사령관 실에 침대를 갖다놓고 작전지휘를 하겠으니 귀하(유석)도 계속 경찰 군으로 작전에 협조해달라』면서 이동계획을 취소했다.
그런 후 유석은 경북도청의 임시 내무부로 돌아와 모든 경찰간부를 모이도록 지시했다. 모두가 떠난 채 초조해 하던 경찰간부들은 이제야 「피난령」이구나 생각해서 어떤 간부는 짐을 챙겨 나오기까지 했으나 뜻밖에도 이탈자는 전시군법을 적용한다는 엄한 대구사수명령이었다. 그러자 경찰간부들은 『내무장관의 만용으로 우리는 모두 죽게됐다』고 불평했고 어떤 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대구가 이런 유석의 힘으로 지켜진 것은 아니지만 내무부의 대구잔류는 민중의 혼란을 줄이는데 큰 도움을 준 영단이었다.
이 박사는 나중 두고두고 유석의 이 결단을 높이 평가했지만 사실은 대통령도 대구에서 끝까지 떠나지 않으려 했다. 「무초」대사와 미군장성들은 8월초부터 대통령에게 부산으로 떠날 것을 권고했다. 대통령은 이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거절의 표면적이유는 『내가 이 이상 더 내려가지 않아야 국민의 동요가 적어진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미군의 전의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이 박사는 우리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부산으로 가지 않으려는 것은 미국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이 사람들이 내가 여기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그대로 있지, 부산으로 가면 언제 대구를 내놓을지 몰라. 죽으나 사나 낙동강을 마지막 방서 선으로 버텨야 해.』
한편 영천이 탈환되고 대구가 위험한 지경에서 벗어나자 「워커」장군은 부산에 있는 이박사가 대구를 방문하면 국군과 「유엔」군의 사기를 높여주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 박사는 즉시 신성모 국방장관을 대동하고 특별기차 편으로 대구를 방문했다. 이때 이 박사는 「워커」장군을 포옹하면서 영천탈환의 전공을 치하하고 영천근교 하양에 있던 국군부대도 시찰, 장병들을 위로했다.
이 무렵부터 이 박사는 사흘이 멀다하고 틈만 있으면 전선을 둘러보고 국군과 「유엔」군의 사기를 높여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부산 피란 시절 이 박사는 평소에 늘 하던 산책도 못할 정도로 바쁘고 답답한 시간을 보냈다.
비는 왜 그렇게 자주 오고 흐린 날이 많았던지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때의 상황이 마치 흐린 날씨와 같아서였는지 모르지만.
흐린 날은 비행기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박사는 제공권의 활용에 장애를 주는 이런 날씨일수록 온종일 우울한 표정이었다.
낙동강전선을 사이에 두고 「유엔」군과 괴뢰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이 박사는 틈을 내어 진해별장을 찾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상념의 시간에도 북괴의 포탄이 별장에서 건너다 보이는 바닷속에 퐁퐁 떨어졌지만 이 박사는 태연히 낚시 대를 담근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루는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차 중에서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때 진해통제부 사령관이던 김성삼씨는 이 박사에게 『일본자위대를 무장시켜 불러들이면 어떻겠느냐?』고 진언했었다.
이 박사는 벌컥 화를 내면서 『우리는 일본 놈이 올라오면 공산군보다 먼저 그리로 총부리를 돌려야 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원래 일본을 싫어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대일 감정은 격해있었다. 언젠가 자유중국에선 3만 명의 국부 군을 파병할 뜻을 전해왔다. 그러나 이 박사는 이것도 한말로 거절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은 9월 초순 이미 이 박사에게 통고되어 있었다.
이 무렵 국회도 행정부의 이동에 따라 대구와 부산으로 옮겨가며 본회의를 열었다. 그 동안 흩어졌던 국회의원들도 모여들어 7월27일 대구문화극장에서 제8임시국회가 문을 열었다. 6월27일의 새벽회의가 자동폐회 된지 꼭 한달 만이었다.
이때 참석한 의원은 재적(2백10명) 3분의 2가 겨우 되는 1백48명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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