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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표준사업별로 그 현장을 가다|지붕 개량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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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제 초가지붕이 한 채도 없는 마을.
경남의령군 가례면 가례부락은 경남일대에서 일찌기 초가지붕이 개량된 새마을 모범부락이 됐다. 마을 사이사이의 길은 폭5m 넓이로 바둑판처럼 다듬어졌다.
모두 2백4가구 1천2백61명 주민의 한결같은 단결과 노력 때문이라 했다.
이 부락에 새마을 혁신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은 작년 봄. 15년간 고향을 등졌던 윤방옥씨(36)가 마을의 선각자였던 그의 선친의 유언에 따라 다시 고향에 내려오면서 부터였다.
윤씨의 아버지 윤병만씨는 1943년 이 마을에 큰불이나 1백80호가 잿더미로 변하고 7명이 불에 타 숨지는 등 마을이 폐허가 됐을 때 정(우물정)자형 구획정리를 하고 도로의 폭을 5m로 넓혀 재건한 선각자. 윤방옥씨는 69년 아버지의 작고이후 경기도부평에 있는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던 것.
그러나 그가 다시 찾은 고향은 56년 고향을 떠났을 때보다 오히려 낙후되어 있었다.
일부주민은 담을 길가에 내쌓아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변해있었고 대낫에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청년들도 있었다.
미신이 성해 하루건너 굿이 벌어져 무당이 2명이나 있었다.
윤씨는 먼저 미신타파에 앞장서서 촌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2백년 묵었다는 마을 앞 둘레4m의 성황나무를 혼자 베어 버렸다.
금년1월 새마을운동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윤씨는 마을 원로 김재구씨(58)와 전부면장 한상국씨(48)등 7명으로 새마을 추진위원회를 구성, 마을개혁에 앞장섰다.
대 화재의 참극을 겪은 부락민들의 숙원은 초가지붕을 면하는 것.
그런데도 마을에는 2백43동의 초가집이 그대로 있었다. 추진위원회는 첫 사업으로 지붕개량을 서둘렀다.
그러나 곧 난점이 뒤따랐다. 첫째 생활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지붕개량을 외면하는 것. 둘째 미신이 심한 마을이어서 지붕을 뜯고 담을 고치는데 날을 가리는 바람에 진척이 없었다.
추진위원회는 1월13일 위원 7명이 직접 가가호호를 찾아 가세조사를 실시, 경제형편에 따라 주민을 5등급으로 나누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력으로, 능력이 없는 2등 이하 5등까지는 당국의 융자금 1백74만원을 등급에 따라 최고 3만원까지 융자를 해서 모자라는 자금은 각자 부담토록 했다.
융자금은 지붕개량으로 남는 볏짚으로 농한기에 새끼를 꼬아 팔면 2년만에 상환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날을 잡아놓고 그날이 아니면 지붕을 뜯을 수 없다는 완고한 반발에는 속수무책이었다.
2월20일이 지나도록 10여호의 실적밖에 올리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짜낸 것은 군수 한영규씨.
윤씨 등 마을의 지도자들과 궁리 끝에 『나라의 명령에는 귀신도 복종한다』는 옛말을 알리며 『지붕을 뜯을 때 「국령」이라고 붓글씨를 쓴 쪽지를 붙이고 뜯으면 액땜을 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때부터 집집마다 대문과 대청에 「국령」이라는 쪽지를 붙여 지붕개량사업은 일사천리로 진전되었다.
지난3월2일로 이 마을에는 초가지붕이 사라졌고 이어 구불구불하던 흙담이 곧은 「블록」담으로 바뀌어졌다.
추진위원 오세대씨(44)의 부인 김경애씨(39)등 주부들도 환경개선에 나섰다.
부엌을 뜯어 서서 작업할 수 있는 조리대를 만들고 하수구를 「시멘트」로 정리하는 일을 직접 해내 30호가 작업을 마쳤다.
새마을 운동의 불길은 가속도로 번져 서석복씨(73·전면장)등 35명의 주민이 스스로 41만원의 성금을 거둬 추진위원회에 맡겼다.
이 돈은 간이상수도·어린이놀이터·공동빨래터 등 앞으로 벌일 공공시설작업에 쓸 계획.
또 각 가정은 23개 항목의 환경개선진도표를 대문에 붙여놓고 작업이 끝날 때마다 추진위원의 확인을 받는 등 마을은 온통 새마을의 개선작업에 열중해 있었다. <의령 신성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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