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나환자와 같이 한 11년|경북 금릉군 광신원의 「문둥이 대장」 이태준 목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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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비탈진 산기슭에 「가나안」의 복지가 이루어졌다. 경북 금릉군 대덕면 화전리 산 66.
한때는 천형의 마을로 비바람에 버려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나환자 48가구 1백2명이 정착해 사는 마을이다. 흔히 부르는 이름은 광신 농원. 처음 이 농장을 이루어놓은 김천 침례 교회 목사 이태준씨 (43)가 지은 이름이다.
농장 8만6천 평의 뽕밭엔 뽕나무 2만 그루가 질펀히 깔렸다. 피둥피둥 살찐 48마리의 소가 이곳저곳의 들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매주 일요일 상오 11시쯤 「잠바」차림의 이태준 목사는 50㏄짜리 조그만 「오토바이」를 타고 농장에 들어선다. 매주 일요일은 그가 「사랑의 날」로 정해 복음을 전하는 날. 농장 어귀 길에 통통거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벌써 농장안 사람들이 이 목사를 맞으러 나와 있다.
『목사님, 이제 오시능기오.』 이 목사는 그를 반가이 맞는 농장 사람들의 손을 잡고 일일이 인사를 나눈다. 올해로써 11년째. 그는 천형이라는 운명의 멍에를 지고 그늘 속에 살아온 나환자들과 함께 지내 왔다. 그래서 김천 시내에서는 그를 「문둥이 대장」이라고도 부른다.
그가 문둥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1년5월의 첫 일요일. 그의 교무처인 김천 침례 교회에서 설교를 마치고 나올 때 50세쯤 된 양성 나환자 한사람이 그의 앞에 다가섰다. 늙은 문둥이의 소원은 『성경책을 한 권 달라』는 것이었다. 나환자들은 으례 주린 끼니를 위해 구걸하는 것이 상례이었으나 성경책을 얻겠다는 소원 앞에 다시 깊이 감동했다. 『인간이면서 인간의 대우를 못 받고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이들에게 신앙을 통한 길잡이가 돼주자』고 결심한 그는 한 알의 밀 알이 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고 했다.
이 무렵 전국을 떠돌던 나환자들은 전남 소록도에 집단 수용하기 위한 당국의 단속에 쫓겨 야산에 숨어살기 일쑤였었다. 지금 광신 농원에 정착된 나환자들도 그때 당국의 단속에 밀려 경남 거창군과 이웃해 있는 산간 벽지인 금릉군 대덕면 화전리에 몰려들었다.
이곳은 경남·북의 도계. 나환자들에겐 단속의 완충 지대로 통했다. 해발 7백m의 속칭 꼭두 바윗골에 움막을 치고 사는 나환자만도 4백여명에 이르렀다.
김천에서 1백리나 떨어진 꼬불 산길을 돌아 이곳에 달려온 이씨는 경사가 완만한 야산을 평당 10원씩 계산해서 모두 3만평을 사들였다. 그는 먼저 『그늘진 생활을 빛나게 이겨내 믿음으로 살자』는 신념을 펴고 이곳을 광신원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나환자들을 모두 모아 『땀흘려 황무지를 개간해서 집을 짓고 농사 지으며 보람되게 살겠다는 뜻이 있는 자는 모두 나를 따르라』고 외쳤다.
김천에 있는 가족들과 교회 신자들에게는 『한달 동안 전도를 나간다』는 말을 남기고 미친 사람처럼 훌쩍 떠나온 이씨는 이때부터 나환자들과 함께 움막 교회를 짓고, 같이 먹고, 같이 잠을 자는 문둥이 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어려움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들 병든 자의 크나큰 약점은 노동력 부족. 썩어 문드러지는 몸으로는 돌산을 기름진 땅으로 바꿔놓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루 10평씩 개간 목표를 세우고 날마다 상오 5시에 일어나면 30분 동안 아침 기도회를 가진 뒤 밥을 지어 먹고 상오 7시부터 하오 5시까지 작업장에 나갔다.
이에 견디다 못한 나환자들은 하룻밤 자고 나면 4, 5명씩 밤사이 자취를 감추는 등 한달 만에 그 수는 절반인 2백여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또 그해 따라 여름철에 장마가 들어 밤낮없이 비가 내리는 통에 오랜 투병에서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진 환자들이 하나씩 둘씩 풀 이슬처럼 죽어갔다.
동료의 허무한 죽음을 지켜보던 다른 나환자들도 노동에 대한 고달픔을 이겨내지 못한 나머지 뿔뿔이 흩어져 구걸 생활로 탈출했다.
더우기 움막을 헐고 집을 짓기 위해 찍어놓은 흙벽돌마저 냇물에 씻겨 떠내려갈 때는 거의 절망적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자연의 시련으로 비를 피할 곳마저 없는 이씨는 움츠리고 떠는 나환자들을 끌어안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하늘을 향해 소리내어 울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처럼 끈질긴 이씨의 정성에 감동한 나환자들은 떠나는 것을 단념하고 『목사님, 추위가 오기 전에 땅을 갈고 집을 지어야죠』라고 도리어 격려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힘입은 이씨는 절망에서 헤어나 1년만에 집을 15채 짓고 땅 5천평을 개간, 수확이 높은 메밀과 뽕나무를 심고 자립의 터전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한달을 계획하고 떠난 이씨가 1년만에 집에 돌아오니 처음 이 같은 사실을 알고 광신원까지 찾아와 한사코 말렸던 부인 서혜자씨 (36)가 반기기는커녕 옷을 몽땅 벗기고 목욕탕에 몰아넣었다고 한다.
처음 「천형의 마을」로 여겨졌던 광신원의 나환자들도 지금은 가구 당 연간 30만원씩의 소득을 올려 지난해에는 추수 감사절에 「파티」도 열었다. 『나환자들의 자활을 위해 스스로 문둥이처럼 생활한 것은 그들에게 떳떳한 인간됨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람차 했다. <김천=이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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