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휴선 회담의 개막 <전반기>(18)|시험 휴전의 내막(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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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11월27일 휴전 회담 제28차 본회의에서 쌍방 수석 대표인 「조이」 제독과 남일은 그 동안 「헨리·호데스」 소장과 이상조 사이에 합의를 본 의제 제2항에 정식으로 서명하였다.
합의 골자는 앞으로 30일 안에 전체 휴전 협정이 조인된다면 현 접촉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하고 4km 폭의 비무장 지대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쌍방 참모 장교들은 현 접촉선을 지도에 기입, 확인하는 작업도 끝내고 이 지도를 서로 교환했다. 이렇게 해서 11월27일부터 12월27일까지 한달 동안의 이른바 「시험 휴전」은 성립 된 것이다.
이 「시험 휴전」은 휴전 협정이 정식 조인 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된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졌지만 사실상 전전선의 포화는 멎었고, 2백30km 전선의 지상군은 참호 속에서 판문점을 바라보며 휴식 상태로 들어갔다. 한달 안으로 휴전이 성립될 수 있다는 전망은 그렇지 않아도 「말리크」 제의가 나올 때부터 돌며 있던 「유엔」군에는 새로운 기쁨과 흥분을 안겨주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전투 병사로서의 사기나 군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흐려진 것이다.
거의 끝장이 나가는 전쟁에서 마지막 전사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같은 생각이다.
더우기 이국 병사들의 그런 심경을 무턱대고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위 수단 외 공격 작전 중지>
지휘관 역시 사병에게 『그대는 마지막 전사자가 되라』고 명령하고 싶지 않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적어도 「유엔」군은 한달 「시험 휴전」 동안 사실상 자위 수단 이외의 모든 전투 행위를 중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유엔」군 측에 많은 혼란과 큰 손실을 가져왔고, 적에는 막대한 이득을 주었다. 의제 제2항에 양측 대표가 서명한 다음날인 11월27일에 AP와 UPI를 비롯한 종군 기자들은 미8군사령부가 휘하 부대에 자위 조치 이외는 공산군에 대한 모든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는 「밴플리트」 8군사령관에 의해 부인되고 전투는 계속된다는 성명이 발표되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솔직히 기록한다면 「유엔」군 측은 1개월간의 휴전안을 공산 측의 성의 타진을 위한 시험기간으로 간주하고 휘하 각 부대에 『협의의 정전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요지 다음과 같은 작명을 하달한 것이 사실이었다.
①작전에 있어 소대 병력 이상을 사용할 시는 반드시 「유엔」군 지상 사령관의 승인을 얻을 것.
②원칙적으로 분대 이상을 공격 전투에 투입시켜서는 안되며 사단 및 군단은 분대의 탐색활동에 대해서도 항상 장악할 것.
③적의 공격에 대한 방위 임무를 담당하는데 부대를 사용할 것이며 필요 없는 새로운 공격을 피할 것.
이와 같은 「유엔」군의 엄격한 병력 사용 및 작전 제한은 공산 측이 목마르게 바라던 바였다. 적은 춘계 공세에서의 대 출혈에 겹쳐 휴전 회담이 개최된 후에도 동부 전선의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등 전투에서 혹심한 피해를 보고 군사적으로는 계속 큰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러던 차에 그들은 30일 동안 마음놓고 병력과 보급 수송에 혈안이 되어 현 전선에 따라 이중삼중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실제로 미 공군 정찰기는 11월29일과 30일에 한국전이래 최대 규모의 공산군 차량 이동을 목격하였다.
모두가 전선으로 향하는 공산군 병력과 보급 수송 차량이었다. 그들은 비참한 패배와 「유엔」군의 북진을 영영 봉쇄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30일 시험 휴전」에 대한 쌍방의 해석이나 이용은 이렇게 판이했던 것이다.
그러나 11월27일에 군사 분계선이 기입 된 지도가 쌍방간에 교환되고 「30일 시험 휴전」이 발표되자 「유엔」군 측은 낙관적 「무드」에 들떴지만 곧 다시 실망과 좌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의제 제2항에 합의를 본 11월27일에 남일은 협상의 조속한 타개를 기도하는 양 즉시 의제 제3항인 휴전 감시 기관의 설치 및 권한 구성 등의 문제 토의에 들어가자고 제의하였다. 「유엔」군 측도 반대할 이유가 없어 「조이」 제독은 즉석에서 이에 동의함으로써 정말 30일 안에 협정에 조인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공산 측, 포로 문제 토의 거부>
그러나 이것은 모든게 세계 이목을 현혹시키기 위한 공산 측의 기만 전술에 불과하였다. 의제 제3항 토의 첫날에 남일은 다음과 같은 5개조 목의 제안을 제출했는데 여기에도 그들의 끈질긴 『선정전 후 협상』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⑴정규 비정규의 육해공군을 포함하는 쌍방의 모든 무장 병력은 휴전 협정 조인 당일부터 일체의 적대 행위를 중지한다.
⑵쌍방의 모든 무장 병력은 협정 조인 후 3일 안에 비무장 지대로부터 철수한다.
⑶쌍방의 모든 무장 병력은 협정 조인 후 5일 안에 군사 분계선의 상대방 후방에 있는 지역·섬·영해로부터 철수한다.
⑷쌍방의 모든 무장 병력은 비무장 지대 안에 출입하지 않으며 또한 이 지대에 대한 어떤 무력 행위도 감행하지 않는다.
⑸쌍방은 휴전 협정 이행의 구체적 조정과 감시를 공동으로 책임지는 휴전 위원회를 양측의 동수 인원으로 구성한다.
이에 대하여 「조이」 제독은 전쟁 재발 방지 보장에 역점을 둔 다음과 같은 7개 조항의 제안을 내놓았다.
⑴휴전은 협정 조인 시간 안에 효력을 발생하며 이는 양측 지배하에 있는 모든 군대에 적용된다.
⑵휴전 협정 조건을 실행하기 위해 쌍방 동수 인원으로 감시 기관을 설치한다.
⑶협정 조인 후 쌍방은 병력·보급·장비·시설을 증강치 않는다.
⑷군사 휴전 위원회는 감시 기능을 달성함에 있어 한국 전역에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
⑸쌍방은 정규 육해공군과 비정규군을 상대방 지배 지역으로부터 모두 철수한다.
⑹쌍방이 특별히 합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무장 지대에는 무장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는다.
⑺쌍방군 사령관은 협정 조항에 따라 비무장 지대에 있는 자기 측 담당 지역을 관할하는 책임을 진다.
이날 「조이」 제독은 의제 제3항과 함께 제4항인 포로 문제도 함께 다루자고 제의했으나 공산 측은 즉석에서 이를 거부하였다. 남일은 「유엔」군 측의 상기 7개조의 제안은 모순과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유엔」 측 제안 제3조는 전쟁 재발 방지에 있다고 하나 이는 전 전투 부대가 철수하면 가능하며, 우선 간편한 방법으로 휴전을 실현시키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공산 측은 「유엔」군 측 제안 제4조의 공동 감시 문제에 대해서도 상대방의 후방 지역을 시찰하는 것은 정탐 행위며 내정 간섭이라고 비난하였다.

<38 이북 도서 철군에 이견>
이는 공산 측이 휴전 후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고 병력을 증강하고 비행장 등의 군사 시설을 보수하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었다. 의제 제3항은 12월4일부터 분과 위원회로 이관되어 토의되었는데 6일까지 군사 휴전 위원회 구성과 협정 조인 24시간 안에 휴전 발효, 그리고 협정 조인 72시간 안에 비무장 지대 안에서의 군대 철수 등 3개 문제에는 합의에 도달했으나 마음과 같은 4개 조목에는 여전히 쌍방의 견해가 대립되었다.
⑴병력 교대 문제.
▲「유엔」측=휴전 후 일정한 수의 병력을 교대할 수 있으며 장비 보충을 할 수 있다.
▲공산 측=외군 철수 문제를 규정하면 이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다. 병력 교대는 허용할 수 없다.
⑵비행장 건설 문제
▲「유엔」 측=휴전 후 새로 비행장을 건설하거나 보수해서는 안 된다.
▲공산 측=신설 또는 보수할 수 있다.
⑶중립국 문제
▲「유엔」 측=군사 휴전 위원회에 중립국 감시 기구를 포함시킬 수 있다.
▲공산 측=중립국 감시 기구는 군사 휴전 위원회와 병립 설치해야 한다.
⑷도서 철수 문제
▲「유엔」 측=현재 위치에서 정전해야하며 38 이북의 도서 문제는 고려할 수 없다.
▲공산 측=38 이북 도서로부터 즉시 철수해야 한다.
이 4개 문제에서 공산 측은 특히 비행장 건설과 도서 철수 문제는 완강히 버티었는데 그들로서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즉 이때 「유엔」군은 서해안에서는 초도·대화 도를 비롯하여 평북 앞 바다의 여러 섬과 동해안은 원산 바로 앞의 여도를 확보하고 첩보 활동과 기습 작전을 수시로 감행하면서 적 후방의 반공 유격대도 지원하고 있었다.

<파괴된 비행장 보수 노리고>
그들은 북한 섬에 있는 아군 거점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며 비행장 문제에 있어서는 미 공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북한 안의 공군 기지를 신속히 재건하려는 속셈이었다. 여하간 한마디로 의제 제3항 토의에서는 유엔군 측이 휴전 후 전쟁 재발 방지를 단단히 보강하는데 역점을 둔데 반해 공산 측은 그들 군사력 재건을 합법화시키려는데 안간힘을 기울였다.
◆주요일지 (1951년8월21·22·23일)
※8월21일 ▲적, 양구 북방서 맹 반격 ▲휴전 회담 제5차 분위 개최 ▲「조이」대표, 동경회담 마치고 문산 귀임 ▲미8군사, 난민의 북상 금지 요청 ▲미, 세계 최초의 핵 잠수함 건조 계약
※8월23일 ▲국군, 양구 북방의 2개 고지 탈환 ▲이 대통령, 중부 전선의 한국 순병대 시찰 ▲공산 측, 미군기의 개성 폭격 항의 코 휴전 회담 중단 ▲영·「이란」 석유 협상 결렬▲미 정보통, 중공의 잠수함 건조 정보 입수
※8월23일 ▲간성 서남서 격전 ▲「밴플리트」 장군, 한국군 1군단의 감투 찬양 ▲평양 방송, 미군이 중립 지대 침범했다고 비난 ▲북경 방송도 휴전 회담 중단 보도 ▲미국무성,「유엔」 참전 15개국과 한국 사태 검토 ▲「맥아더」원수, 일본은 적절한 병력을 보유해야한다는 서한을 길전 수상에 전달 ▲영 정부, 「이란」의 「아비안」 정유소 불 포기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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