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해진 항로 없이 … 매일 수십대 헬기 서울 도심 비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7면

17일 오전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는 전날 사고 여파로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헬기 잔해가 있던 102동 앞은 거주자와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이날 오전 강한 바람이 불면서 충돌한 층에서 떨어지는 잔해에 맞는 등 2차 피해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다. 현장을 지키던 경비원은 건물을 드나드는 주민들을 향해 “건물에서 잔해가 떨어질 수 있으니 돌아서 가라”고 외쳤다. 주민 홍모(54·여)씨는 “지금도 파편이 떨어지고 있는데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에게도 대피하라고 말해야 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했다.

 지상 39층인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에 헬기가 부딪히는 사상 초유의 사고가 나면서 한강변 등의 초고층건물이 헬기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현재 서울시엔 30층 이상의 고층건물이 322곳, 50층 이상의 초고층건물이 16곳(공사 중인 3곳 별도) 있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123층 규모의 제2롯데월드(‘롯데슈퍼타워’)도 2015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50층 이상의 초고층건물 중 9곳이 아파트·주상복합 등 공동주택이기 때문에 충돌 사고 시 심각한 인명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초고층건물은 조망권이 좋은 한강 인근과 여의도에 몰려 있다. 한강을 ‘하늘길’로 시계비행하는 헬기에 취약하다는 지적이다. 건국대 정성남(항공우주정보시스템공학) 교수는 “고층건물이 많이 늘어난 것도 이번 사고 원인 중 하나”라며 “아무리 베테랑 조종사라도 지형지물이 바뀌면 순간적으로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25년 비행 경력의 한 조종사는 “비행기나 전투기의 경우 서울 등 도심에서도 관제사의 지시에 따라 계기비행을 하기 때문에 건물에 부딪힐 위험이 거의 없지만 헬기의 경우 저고도에서 시계비행을 하기 때문에 건물에 부딪힐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말했다.

 50층 이상 초고층건물의 34%(24채)가 몰려 있는 부산도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초고층빌딩들이 병풍처럼 들어선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 하늘에도 축하비행이나 인명구조 활동을 위해 헬기들이 자주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특히 마린시티 해변에는 해무가 자주 끼어 30층 위로는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마린시티 아이파크(최고 높이 72층, 300m) 53층에 사는 주민 손모(50)씨는 “거실에 있다가 헬기들이 눈앞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아찔하다. 이번 헬기의 고층빌딩 충돌 사고를 보니 우리 건물에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 불안하다. 주민들과 안전대책 마련을 의논하겠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두산제니스위브(최고 높이 80층, 301m) 김성철 시설안전팀장은 “헬기가 건물에 접근하면 경보등과 경고음을 내는 시스템을 설치하거나 옥상에 큰 깃발을 세우는 방안을 주민들과 마련하겠다. 이제는 이러한 시스템 개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서울 도심에 매일 헬기가 수십 차례 운항하고 있지만 정해진 항로는 물론 특별한 운항규제도 없다. 인구 밀집지역이나 고층건물이 많은 도심은 운항을 자제하라는 권고사항만 있을 뿐이다. 단 시계비행하는 항공기에 대해선 인구·건물 밀집지역에선 가장 높은 건물보다 300m 높게, 이외 지역에선 150m 높게 비행하도록 최저비행고도를 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고처럼 착륙지점에 거의 도착해 고도를 낮춰야 하는 경우 이 같은 최저비행고도를 지키기 어렵다.

 초고층건물에는 항공기에 건물 위치를 알리는 ‘항공장애등’ 외에도 시계비행으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헬기에 대한 안전대책이 필요하다. 오종범 서울시 재난관리팀장은 “현재 항공 사고와 관련한 재난 매뉴얼은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에서만 운영되고 있다”며 “ 기존 재난 대응 매뉴얼에 서울시 차원의 항공재난관리 수습 매뉴얼을 보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 관계자는 “김포·잠실·노들섬·팔당댐 등 주요 헬기장에 ‘기상상황 실시간 측정장치’를 설치해 서울지방항공청이 관제자료로 활용토록 건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산=김상진, 손국희·신진 기자 <9key@joongang.co.kr>

시계비행(VFR·Visual Flight Rule)=조종사가 직접 눈으로 지형을 보고 항공기를 조종하는 비행 방식. 항공기에 장착된 계기와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운항하는 계기비행과 달리 비행의 모든 책임이 조종사에게 있다.

관련기사
▶ LG헬기 충돌때도…"안개속 비행은 눈 감고 하는 것"
▶ [단독] "한강변 아파트, 헬기 조종간 틀면 10초 내로…" 충격
▶ "헬기 충돌 경보장치 작동 안 했나…일부러 껐나
▶ 1대 84억원 하늘 위 리무진…英 왕실도 애용"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