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기 충돌 경보장치 작동 안 했나 … 일부러 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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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에서 충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9분이었다. 사고 헬기는 목적지인 잠실 착륙장을 2㎞ 정도 남긴 지점에서 정상 경로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16일 오전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 아파트에 부딪혀 추락한 LG전자 소속 헬기 사고를 둘러싸고 의문점이 증폭되고 있다. 특히 베테랑 조종사인 고 박인규(58) 기장이 막판에 급히 경로를 바꾼 이유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공사 출신의 박 기장은 비행시간만 7000시간, 대통령 헬기를 10여 년 조종한 경력이 있다. 짙은 안갯속 비행을 감행한 이유와 충돌경보장치가 장착된 최신 헬기임에도 아무런 사전 이상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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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항로 변경했나=사고 헬기는 도착까지 1분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목적지와의 직선 항로로부터 40~50도 오른쪽으로 기수를 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불과 10여 초 만에 아파트와 충돌했다. 전문가들은 사고 헬기가 안개로 착륙장이 잘 보이지 않자 경로를 바꿨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한다.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16일 오전 5시 중구 송월동 기상관측소에서의 시정은 2.5㎞였지만 사고 직후인 오전 9시에는 1.1㎞로 나빠졌다. 사고 현장과 가장 가까운 기상관측소인 성남 공군기지의 가시거리는 800m였다. 기상청 허진호 통보관은 “오전 7시20~50분에는 서울 지역 시정이 1㎞ 미만으로 나타난 적도 있다”며 “같은 서울 시내라도 지역에 따라 시정이 더 나쁜 곳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아이파크 아파트에는 항공기가 장애물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한 ‘항공장애등’이 깜빡이고 있었지만 사고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서대 최연철(헬기조종학과) 교수는 “김포공항 출발 때 시계가 확보됐다고 판단해 이륙했겠지만 목적지 근처까지 왔는데도 시계가 안 좋아 급히 선회하다 일어난 사고일 수 있다”고 말했다.

 ◆무리한 비행이었나=안개가 꼈는데도 무리하게 비행에 나섰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미 연방항공청이 지난해 발간한 ‘헬리콥터 비행 핸드북’에선 “안개를 뚫고 나가는 경우 상승하고 있다는 착각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헬기 조종 경력 23년인 장진환(47)씨는 “아파트 28층쯤에 부딪힌 것이라면 이착륙할 때 충돌 위험이 있는 고도가 아니다”며 “하지만 안개로 인해 착륙지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경로를 틀었다가 아파트가 갑자기 나타나면 돌발적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헬기업체 관계자는 “뉴욕은 주요 도심 헬기장에 관제시설이 갖춰져 있어 이착륙에 도움을 준다”며 “소규모 관제시설이라도 구축돼 있었으면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충돌 경보장치 있었는데=사고 헬기에는 충돌 경고장치인 E-GPWS(지상근접경보체제)가 설치돼 있다. E-GPWS는 위성항법시스템(GPS)상 헬기의 현재 위치와 지도 등고선 차이를 판독해 지상에 가까워지는 등 충돌 위험 상황이 발생하면 경보음을 낸다. LG전자 측은 “항공기 운행 전 반드시 점검을 하도록 돼 있다”며 “사고 헬기도 점검을 마쳤지만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최연철 교수는 “착륙 지점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고 근처에 건물이 많아 장치상으로는 모두 장애물로 식별할 수 있으므로 일부러 끄고 운행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경보가 울렸더라도 미처 대응을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윤식 교수는 “GPS에는 영동대교·성수대교 등 큰 지형지물만 포함돼 있어 삼성동 아이파크 아파트가 GPS에 들어가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며 “GPS에 없는 지형물은 E-GPWS가 잡아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정봉·안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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