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근시적 사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사람의 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근시가 있다. 먼 것이 잘 안 보이는 눈이다. 이와는 반대로 가까운 것이 잘 안 보이는 원시안도 있다.
색맹이라는게 또 있다. 적색이나 녹색의 식별이 안 되는 눈이다. 색맹보다는 약한 색약이라는 것도 있다.
원·근시의 경우에는 안경을 쓰면 어느 경도 교정이 된다. 그러나 근시의 사람은 모든 것을 가깝게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긴다. 이래서 이들은 자연 사고에 있어서도 근시안적이 되기 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은 시력과 사고의 넓이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을 턱은 없다. 그러면서도 소견머리 없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을 흔히 근시안적이라고 표현한다. 이와는 반대로 멀리 앞을 내다보는 것을 원시안 적이라고 한다.
이렇게만 본다면 분명 근시안은 반갑지 않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마이크로」와 「매크로」라는 표현을 더 잘 쓴다. 곧 미시안과 거시 안의 뜻이다. 아무리 크게 멀리만 본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이와 아울러서 미세한데 까지 눈이 갈 수 있어야만 한다. 이래서 미시와 거시가 겹친 상태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네 주변에서는 이런 미시가 아니라, 너무 근시적인 일들만이 펼쳐지고 있다. 가령 최근에 외내차의 탈세를 막기 위해 새로이 0으로 시작되는 번호 판을 마련했다.
현재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한 두 해만 지나면 외내차 수는 만대가 넘을 게 틀림없다 그러면 다시 번호판 제도를 바꿔야 한다. 조금만 원시안 적이었어도 피할 수 있는 공연한 낭비이다.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닐 게다. 모든 것을 이렇게 대범하게(?) 생각하는 게 거시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차주들에게는 별 지장은 없다.
그러나 전화번호와 같은 경우에는 결코 그렇게 대범해질 수는 없다. 전화번호는 상호나 이름과 같은 때가 많을 뿐 아니라, 웃돈 주고 애써 골라 산 「러키·넘버」들도 있다. 그런 번호들을 동대문 국에서 갑자기 바꾼 것이다. 작은 일이 아니다.
한국의 전화가 9천9백99대를 돌파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가입자들의 불편과 손해를 초래하게 만든 것은 따져본다면 체신당국의 근시안 탓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번호변경의 통고를 고작 1주일 전에야 했다는 것은 혹은 시민들의 권익을 잘 식별하지 못하는 당국의 색맹 탓인지, 또는 그렇게만 보이는 게 색안경을 쓴 탓이라고만 돌려댈 수 있는 일인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