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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범죄와 총기 사고의 공통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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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복
워싱턴 특파원

얼마 전 미국에서 카드 도용 피해를 당했다. 지갑 속에 카드가 멀쩡히 있는데 누군가 내 카드 번호를 이용해 온라인 쇼핑몰을 훑었다. 결제 시간은 새벽 3시, 우리 돈 10만원 이내 물건만 골라 구매했다. 금액이 크면 꼬리를 밟힐까 우려한 듯했다. 다행히 피해 사실을 빨리 알아 카드사에 연락했지만, 보안전문가로부터 무기력한 답변만 들어야 했다.

 “사전 결제만 됐으니 빨리 조치하면 됩니다.”(기자)

 “승인이 끝나야 범죄가 성립합니다. 기다리시죠.”

 “그냥 피해를 당하라고요? 쇼핑몰 측에 연락만 하시면 됩니다.”(기자)

 “관련 사건이 너무 많아 일일이 사전 대응하긴 어렵습니다. 피해보상 장치가 완벽하니 걱정 마시죠. 나중에 조사는 합니다.”

 “범죄를 미리 막을 방법은 없나요?”(기자)

 “그런 게 어딨어요? 저도 지난달에 당했습니다.”

 음식 값을 계산할 때 카드를 맡기는 미국 문화에서 카드 범죄는 맘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다. 외지인들이 거쳐가는 지역 주유소도 범죄의 온상으로 꼽힌다. 하지만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 피해를 당해도 역추적이 어렵다. 주마다 제도가 달라 일관된 보안장치 마련도 쉽지 않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사전 예방보다는 사후 피해구제 조치가 더 발달했는지 모른다. 문화와 시스템을 쉽게 바꿀 수 없으니 그게 피해를 줄일 최선의 방책이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 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다. 미국 사법부의 수장인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도 얼마 전 새 카드를 발급받았다.

 이런 점에서 카드 범죄는 총기 사고를 닮았다. 요즘 미국에서 총기 사건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어난다. 학교에서, 군 시설에서, 종교기관에서, 공항에서…. 한마디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웬만큼 사람이 죽어선 뉴스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초등학생들이 총탄에 쓰러지고 대통령이 전면에 나섰어도 총기를 규제하는 법안은 전혀 진척이 없다. 민첩하고 단호한 사고 대처 능력은 혀를 내두르게 만들지만, 예방 부문에선 빵점 그 자체다. 해킹 프로그램을 통해 전 세계를 감시해온 미국이라곤 믿기 어려운 모습이다.

 어떤 범죄든 예방이 사후 조치보다 효과적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미국의 카드 범죄와 총기 사건은 예방주사를 맞는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준다. 어떤 이유로든 전환점을 넘고 나면 역주행은 불가능해진다. 이미 총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 총기 규제의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이런 상황에선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기 위해 자연스레 사후 조치에 집중하게 된다. 대신 매일 “오늘도 무사히”를 되뇌며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게 안전한 사회일까. 초동 수사가 중요하듯 정책도 초기 설계가 핵심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는다.

이상복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