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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대해부] 3. 계속되는 반쪽짜리 연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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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옛날 농부들은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종자씨를 까먹는 법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건 알곡을 거두기 위해서는 씨를 뿌려야 하고 열매를 따기 위해서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죠."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은 최근 한 TV광고에서 국민연금을 종자씨에 비유했다. 아무리 살림이 궁색해도 앞날에 대비해야 안정된 노후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중소기업에서 퇴출된 뒤 건설현장을 전전하며 일용직으로 일하는 朴모(38)씨는 이런 말을 귀담아들을 여유가 없다. 朴씨는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연금 보험료를 어떻게 내느냐"고 말한다.

정부는 99년부터 '전국민 연금시대'가 열렸다고 요란하게 홍보하고 있으나 朴씨처럼 연금 혜택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 연금의 사각지대(死角地帶)에 있는 사람이 전체 가입 대상자의 절반 가량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별다른 노후대책이 없어 정작 연금이 필요한 계층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반쪽짜리 국민연금'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다.

사각지대가 너무 넓다=지난해 말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는 1천6백50만명이다. 이 가운데 보험료를 안내는 사람이 49%인 8백15만명이나 된다.

특히 실직과 사업 중단 등의 이유로 1년 이상 보험료를 내지 않은 3백46만명(납부예외자)과 1년 이상 보험료를 체납한 1백78만명은 이미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연금공단은 "납부예외자로 있다가 재취업 등으로 소득이 발생해 보험료를 내면 국민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금공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0년 이후 지역가입자 중 납부예외자의 비율이 지역가입자의 42~44%선에서 더 이상 줄지 않는 점을 감안할 때 공단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회 변화를 못따라 간다=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커지면서 비정규직 근로자가 급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비정규직 근로자는 7백37만명으로 98년 말에 비해 1백9만7천명 늘어났다. 전체 임금근로자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도 45.9%에서 54.0%로 증가했다.

그러나 지난해 비정규직 근로자의 연금 가입률은 21.5%에 불과했다. 연금공단 관계자는 "납부예외자나 체납자의 상당수가 비정규직 근로자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많은 정규직 근로자들이 비정규직으로 바뀌면서 납부예외자가 됐을 것이란 얘기다.

이 같은 문제점은 본지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났다. 본지가 최근 전국 18~59세 남녀 1천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소득이 낮을수록 노후 대비가 허술했다.

월 소득이 1백만원 이하인 사람은 32.1%만이 개인저축이나 투자를 한다고 응답했다. 3백만~5백만원인 사람은 53.9%였다. 국민연금 가입률도 월 소득 1백만원 이하인 경우는 37.8%로 3백만~5백만원인 사람(42.6%)보다 낮았다. 특히 1백만원 이하인 사람들 가운데 27%는 별다른 노후대책이 없다고 했다.

보건사회연구원 석재은 연구위원은 "연금 사각지대에 몰린 사람의 대부분이 연금이 가장 필요한 저소득자나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정규직과 남성 가장 위주로 돼 있는 현행 연금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혜택 받는 노인이 너무 적다=지난해 분식집을 처분한 뒤 벌이가 없는 高모(63.여)씨는 두 아들이 주는 용돈(월 50만원)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국민연금이나 개인연금은 상상도 못한다. 高씨는 "몇년 전 국민연금에 가입하라고 할 때 건성으로 듣고 넘긴 게 몹시 후회된다. 당시엔 쓸데없이 돈만 걷어가려는 것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지난해 말 현재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국민연금을 받는 사람은 28만명으로 전체 노인의 7.4%에 불과하다. 공무원.사학.군인연금을 받는 사람들을 합쳐도 연금 수혜자는 8.4%밖에 안된다. 노인 1백명 중 8명 정도만 연금 혜택을 받는 셈이다.

저소득층 노인 61만6천명은 월 3만5천~5만원의 경로연금을 받고 있다. 금액이 너무 적을뿐더러 이마저 전체 노인의 16%에 불과하다.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이태수 교수는 "연금제도를 바꾸더라도 사각지대에 놓인 계층은 보험료를 제대로 낼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이라면서 "이들을 연금제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세금으로 보험료를 내주고 모든 사람에게 월 20만원 가량의 연금을 보장하는 '기초연금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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