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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개성의 함정(1)|휴전회담의 개막<전반부>(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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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1년7월8일, 쌍방군사령관의 합의에 따라 10일에 열리는 휴전회담 제1차 본회의를 준비하기 위하여 양측 연락장교들이 개성근교의 내봉장(주=6·25전 이현재씨의 개인저택)에서 회합하였다. 적의 남침이래 피·아군 장교들이 처음으로 전쟁터 아닌 회담장소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유엔군측 연락장교는 앤드루·J·키니 공군대령(수석), 제임즈·C·머리 해병대령, 이수영 한국군중령이었고, 공산 측은 장춘산 북괴군대좌(수석), 채청문 중공군중좌, 김일파 북괴군 중좌였다.
다음은 이 회의에 참석했던 유엔군 연락장교와 동행한 통역장교의 증언.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적측 장교와의 첫 대면에서 애초의 낙관적인 기분이 사라지고 공산 측과의 협상이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제임즈·C·머리 해병대령의 수기. (주=윌리엄·H·배처 저 『판문점(Panmunjom)』에서 발췌)

<개성시내는 폭격으로 폐허화>

<7월8일의 연락장교 회의는 라디오 방송교환을 통해서 마련되었다. 이날 합의된 시간인 상오9시에 우리는 헬리콥터로 문산을 떠나 적지인 개성으로 비행했다. 몇분 후에 현지상공에 이르러 폭격으로 폐허된 시내를 빙빙 돌면서 공산 측이 마련해놓게 된 표지를 찾았다.
처음에 지프 한대가 거리를 미친 듯이 달리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공산대표들의 도착이 늦었는가. 그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날인 7일 상오 5시에 평양을 출발한다고 통고해 왔는데 오고도 남을 시간이 아닌가. 회합 시간과 장소에 대해 어떤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닌가. 다시 한바퀴를 도니까 비로소 시내 북쪽에 마련한 비행기착륙표지판이 보여 우리는 그곳에 내렸다. 착륙장소에는 공산군들이 빽빽이 둘러싸여 우리 헬기를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헬기에서 내려 그 옆에 서서 기다렸다. 헬기 엔진이 꺼지자 우리를 바라보던 공산군들 사이에는 잠시 살벌한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도 불안한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안 있다가 한 안내장교와 여자도 낀 2명의 통역이 둘러싼 공산군을 헤치고 나와 조심스럽게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우리를 지프에 태워 내봉장으로 안내해갔다.
공교롭게 그들이 내는 지프는 지난겨울 전투에서 미군한테 노획한 것으로 아주 낡은 것이었다. 우리가 내봉장에 들어서자 공산측 장교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신분을 밝힌 다음 다시 착석하여 담배를 피우고는 장춘산 대좌가 옆방으로 안내했다. 녹색 보를 씌운 테이블에 마주앉아 우리는 그들과의 첫 회담에 들어갔다.>
▲이수영씨(당시 유엔군측 연락장교=중령·예비역육군대령· 현 주불대사·51·주=본사 장덕상 주불특파원 회견)<7월8일에 열린 쌍방 연락장교 회의의 임무는 본 회담 개최장소와 시간 등을 결정하는 것이었읍니다. 우리 유엔군 장교들이 문산의 베이스·캠프를 떠나기 직전에 리지웨이 장군이 격려의 훈시를 했어요. 내용은 미국군대는 세계최강이며 우리는 명예로운 휴전을 이룩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연락장교들의 신변보호에는 만전을 기할 터이니 안심하라고 해요.
그러나 모두 가슴이 설레고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8일의 연락장교 회의는 큰 말썽없이 10일의 본회의 절차를 마련하고 끝났어요. 이때 우리가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양보한 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가끔 아군 탱크가 탐색하러 들어가곤 했던 개성과 그리고 옹진반도가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넘어가게 됐으니까요.
휴전회담 개최 전에 이승만 대통령도 밴플리트 사령관에게 개성과 옹진반도를 확보할 것을 강경히 주장했어요. 밴플리트 장군은 그 지역을 확보하려면 미군 2개 사단이 더 필요한데 현재로는 1개 연대도 증파할 여력이 없다고 하면서 포기한 거지요.

<"회담 2년쯤 걸린다"에 깜짝>
그러나 옹진반도는 몰라도 개성은 그곳이 회담장소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휴전 후에도 우리가 차지했을 거예요. 8일의 연락장교 회의에 떠나기 전 베이스·캠프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유엔군측 수석대표인 C·터너·조이 제독이 나를 보고 『오늘회의에서 북괴장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잘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요. 기가 막혀서 대답을 안하고 있으니까 『그들도 대한민국 사람들과 같은 말을 사용하느냐?』고 재차 묻습디다. 참 너무도 한국사정을 모르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유엔군측 대표들은 휴전회담이 단시일 안에 끝날 줄 알았어요. 보니까 모두들 3주일간의 출장증을 끊어 가지고 왔어요. 그러니까 2주일정도면 회담을 마치고 돌아갈 줄 생각했던 모양이지요.
유엔대표 한사람이 어느 공산권 기자에게 회담이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고 물었어요. 그가 2년쯤 걸릴 거라고 하니까 그 유엔대표는 깜짝 놀라면서 당신 돌지 않았느냐고 합디다. 처음에는 회담전망을 이렇게 낙관한 거지요. 그러나 10일의 본회의 첫날부터 전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지요.>
▲리처드·F·언더우드씨=한국명 원득한(당시 유엔군측 대표 통역장교=중위·현 서울외국인학교총감·44)<50년8월초에 동래 포로수용소에서 심문관 통역을 하다가 그해 12월25일에 부산의 미군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51년7월초에 갑자기 동경으로 오라는 명령이 왔어요.
동경 유엔군 사령부에 3일 있으니 키니 대령, 머리 대령, 그리고 중국인 2세인 케네드·우 준위와 함께 비행기에 타라고 하데요. 그때까지도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비행기에 오르고서야 개성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울에 와서 이수영 중령과 서기 2, 3명과 합류하여 헬기로 개성으로 날았지요. 우리가 연락장교회담을 위해 개성에 들어가기 바로 전날까지 아군 탱크대가 그 도시로 들어갔다가 나왔기 때문에 무인지대(노맨즐랜드)로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까 무장한 공산군이 우글우글해요. 우리 일행은 무척 놀랐고, 기분도 몹시 나쁩디다. 처음부터 우리기를 죽이려는 수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헬기에서 공산 측과 만나기로한 지점근방을 내려다보니 흰 깃발을 단 적의지프가 착륙장소로 안내합디다. 우리 일행 중에는 통신사 한 명이 등에 연락용 통신기를 지고 늘 문산 본부와 연락을 취했어요.

<무전 끊기면 사고 난줄 걱정>
이 통신사는 만약 통신이 두절되면 예비회담 대표단 신변에 부슨 사고가 생긴 줄 알라고 미리 알린 모양인데 통신기의 성능이 좋지 않아 문산에서 여러번 애를 태우며 걱정을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어요.
공산측 연락장교들과 내봉장에서 첫 대면을 가졌는데 그들은 술·담배·주스 등을 내놓데요. 첫날 회의에서는 본회의를 7월10일에 우리 연락장교가 만난 그 장소에서 열기로 합의를 보고 끝났읍니다.>
한편 공식회의록을 보면, 첫 연락장교회의 분위기가 대단히 딱딱했으며 공산측 태도가 극히 교조적이었다는 것이 나타나있다. 유엔군 대표들은 그들과의 첫 대화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수법과 동양논리가 서구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갸우뚱했다는 것이다. 스탠퍼드 대학과 후버 연구소에 소장돼있는 한국휴전회담 공식회의록 사본에는 7월8일에 쌍방 수석연락장교들이 주고받은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있다.
▲키니 대령=『당신 대표는 7월10일에 본회의를 여는데 동의합니까?』
▲장춘산 대좌=『본회의 개최시일은 양측 군사령관들이 결정했읍니다.』
▲키니=『아니오. 양측 군사령관들은 7월10일부터 15일 사이의 어느날을 택해서 만나기로 합의했을 따름이오. 정확한 날짜는 정하지 않았소.』
▲장=『본회의 개최일자는 양측 군사령관이 합의한대로 해야하오.』
▲키니=『그럼 언제? 10일, 11일, 12일, 어느 날짜로 정하겠다는 거요?』
▲장=『이 문제는 양측 군사령관들이 이야기한 것이오. 연락장교 회의에서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니잖소.』
이때 머리 대령이 키니 대령에게 귓속말로 『공산군 연락장교들은 본회의 개최날짜를 정할 권한이 없는 것 같으니, 우리가 일방적으로 시일을 확정, 통고해 보라』고 조언했다.
▲키니=『유엔군사령부 본회의 대표들은 7월19일 상오11시에 개성에 회담하러 도착할 것이오.』
▲장=『양측 군사령관이 합의했다면, 그렇게 할것이오.』

<기지로 본 회담 날짜결정 통고>
이상이 7월8일 쌍방수석 연락장교가 주고받은 대화의 전부였다. 첫 회합부터 휴전협상을 질질 끌려는 저의가 노골적으로 엿보이고 있다. 머리 대령의 기지로 유엔군측이 회담일자를 일방적으로 결정 통고하여 7월10일부터 본회의가 열리게는 되었다. 공산 측은 첫날부터 유엔군측 대표에게 무장군인으로 헬기를 에워싸는 등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책략의 시작에 불과했다. 제1차 본회의부터 유엔대표들은 공산 측이 파놓은 함정에 점점 빠져 들어가게 됐다는 것을 알게된다.
주요일지(1951년7월7·8·9일)
※7월7일▲한만 국경서 50대 이상의 피아 제트기 공중전▲B29, 고원 맹폭▲유엔군 연락장교, 문산으로 향발 ▲서울, 각 구 1교씩 개교 ▲신성모 주일대사 부임 ▲트 대통령, 평화와 우의 강조한 메시지를 소련에 전달
※7월8일▲미 공군, 수천 대의 적 차량 남하목격 ▲전국경찰, 2일∼8일까지의 공비소탕전과 발표-사살6백41·생포99·귀순10 ▲휴전연락장교회담 개최 ▲듀이 뉴요크 주지사, 이 대통령과 회담 ▲중공계 대공보, 한국휴전 낙관보도 ▲소련군, 모스크바 근교서 대전시 비행
※7월9일▲아군, 국지적 공세 계속 ▲밴플리트 장군, 대장승진 ▲유엔군 휴전회담대표, 문산에 도착 ▲리지웨이 사령관, 공산 측의 성의표시 여부는 회담장에서 알 거라고 언명 ▲영국, 대독전쟁상태 종결을 공식선언
※알림=한국휴전회담 관계자료나 사진을 가지고 계신 분은 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으로 연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락전화=(29)8211(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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