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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끊겨 방송 통해 부고 알려 … CNN 특파원 필리핀 3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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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3일 수퍼 태풍 하이옌으로 인해 폐허가 된 필리핀 중부 해안도시 타나완에서 이재민들이 구호 물자를 지급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타나완 AP=뉴시스]

“용서해줘. 조시가 하늘나라로 갔어. 거센 파도가 우릴 갈라놓았어. 걔 손을 잡을 수조차 없었어.”

 눈물범벅이 된 중년 남자가 TV 카메라를 보며 흐느꼈다. 쓰레기더미 같은 건물 잔해가 그의 뒤에 비쳤다. “내 딸 조시가 저기 누워 있어요, 벌써 사흘째예요.”

 또 다른 남자는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애들 엄마가 이걸 봤으면 좋겠네요, 미국 버지니아에 있는데. 여보, 보고 있어? 저스틴과 엘라가 갔어. 둘 다 죽었다고.”

 12일(현지시간) 미국 CNN과 제휴한 필리핀 현지방송 ABS-CBN 카메라가 전한 레이테 섬 생존자들의 육성이다. 수퍼 태풍 하이옌은 전화·인터넷 같은 통신수단을 끊어놓았다. 생사와 안부를 전할 수 없었던 이들이 너도나도 카메라 앞에 섰다. 생존의 기쁨은 찰나일 뿐, 살아남은 이들은 눈앞에서 파도가 앗아간 이들에 대한 죄의식으로 오열했다.

국민 10% 해외 돈벌이 … 행방 몰라 애태워

 특히 가족 일부가 해외에 나가 있는 경우엔 TV 카메라를 빌려 사랑하는 사람의 부고를 전해야 했다. 한 청년은 해외에 있는 아버지와 형에게 조카의 죽음을 전하면서 “먹을 것이 없다. 얼른 도와달라”고 울먹였다.

 필리핀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410달러(약 473만원, 세계은행 2012년 통계)로 세계 180개국 중 122위인 가난한 나라다. 이 때문에 국내 인구(약 1억 명)의 10%에 해당하는 1000만 명이 해외 217개국에서 일하며 번 돈을 필리핀으로 송금한다. 미국이 340만 명으로 제일 많고 사우디아라비아(155만)·캐나다(84만) 등에도 진출해 있다. 한국에서도 8만7000여 명이 공단노동자·영어강사 등으로 일하고 있다.

 하이옌 참사는 이들 1000만 이주노동자들의 가슴도 찢어놓았다. 아랍에미리트(UAE)에 사는 나이시 유보노는 “큰딸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금요일 새벽 1시였다”고 CNN에 말했다. “딸이 문자로 ‘바람이 너무 강해서 무섭다’고 했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쏟았다. 역시 UAE에서 기술자로 일하는 앤드루 엔데레즈는 타클로반에 두고 온 아내와 네 아이의 생사를 애타게 확인 중이다. 그는 “혹시 이 얼굴들을 보면 꼭 제게 연락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구글 실종자 찾기 페이지에 가족사진을 올렸다.

구호물자 마닐라·세부 묶여 굶주림 허덕

수퍼 태풍 하이옌이 강타한 필리핀 타클로반 시에서 구조활동을 하는 군인들이 13일 공항에서 수송기를 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 쓰러진 여성을 옮기고 있다. [타클로반 AP=뉴시스]

 미국 인디애나주에 사는 론 존스턴과 채리티 부부는 베이베이에 사는 부모의 생존을 확인했다. 하지만 물도 식량도 다 떨어진 그곳에서 노인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근심스럽다. “건물 열 채 중 한두 채만 남아있다니, 수퍼마켓도 약국도 없을 텐데요. 돈이 있어도 살 수도 없을 거고요.”

 특히 인구 22만 명 중 사망자가 1만 명에 이를 것으로 우려되는 타클로반 상황이 심각하다. 타클로반에서 중앙일보·JTBC에 현지 소식을 전하는 CNN 특파원 폴라 행콕스와 닉 패이튼 월시는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미친 듯이 돌무더기를 뒤지는 얀 초우라는 남자를 만났다.

 “딸과 문자를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끊겼어요. 태풍이 막 휘몰아쳤을 때예요.” 그는 딸이 어딘가에 쓰러져 있을지 모른다며 건물 잔해를 헤집었다. 13일 딸의 시신은 집 근처에서 발견됐다. 전날 아들 시신을 발견한 곳과 멀지 않은 데였다.

 CNN 특파원들은 “식량구호가 필요한 이들이 약 200만 명에 이른다”면서 도로 등 운송체계 마비로 이들 상당수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답지하는 국제사회의 온정과 달리 13일에도 상당수 구호물자와 인력이 마닐라나 세부 등에 묶여 있다. 타클로반에 들어가서도 건물 잔해에 길이 막혀 정작 이재민들 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이재민들도 폭도로 돌변하고 있다. GMA방송 등 현지 언론이 13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전날 이재민 수천 명이 타클로반의 정부 식량창고를 습격해 비축미 약 10만 포대를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창고건물 벽이 무너지면서 8명이 깔려 죽었다.

 유엔 집계에 따르면 태풍 이재민 구호에 3억 달러(약 3217억원)의 재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필리핀이 인프라 복구를 위해 책정한 재원은 230억 페소(약 564억원)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 13일 발레리 아모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국장은 피해지역의 식량과 보건, 위생, 주거, 잔해 제거, 취약층 지원에 초점을 맞춘 ‘행동계획’에 국제사회의 동참을 호소했다. 조에이 살세다 유엔 녹색기후기금 의장은 필리핀 경제가 하이옌으로 인해 6040억 페소(약 14조8200억원) 규모의 피해를 봤다며 올 필리핀 GDP의 5%가량이 증발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놨다.

월시 특파원(左), 행콕스 특파원(右)

 한편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12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태풍 사망자 수가 1만 명에 이른다는 보도가 “너무 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파악한 (사망자) 숫자는 2000명 또는 2500명”이라며 “경찰과 지방정부를 인용한 사망자 추정치에는 감정적 트라우마가 섞여 있다”고 말했다. 반면 필리핀 방재기구는 이날까지 중부 레이테 섬과 인근 사마르 섬 등지에서 모두 2275명이 사망하고 최소한 3665명이 부상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또한 약 60만 명이 집을 잃은 것으로 집계했다.

강혜란·채승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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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못 지켰어, 용서해줘" … 통곡하는 기러기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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