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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 영감|서울 종로구 견지동 전병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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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 종로구 견지동14, 흔한 서울의 재래식 한옥에 「상소 영감」이 산다. 고희를 넘은 74세의 전병수씨. 나지막한 키에 곱게 늙은 얼굴. 겉으로는 하등 남 다를 게 없는 범부란 인상이다.
그러나 「상소영감」이란 발명처럼 비라고 여겨질 때 꼬치꼬치 따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
그는 가위 평생을 두고 나라 일을 걱정하며 그때마다 진정서를 써서 관계 당국에 건의하곤 하는 꼬장꼬장한 성품이었다.
진정서의 서안도 옛날 유림들의 상솟장처럼 꼭 두루마리에 붓글씨. 건국 후 지금까지 26년간 낸 진정서가 모두 1백여통에 이른다. 상대는 장관이상 행정 책임자. 「두루마리 인생」이었다.
이중 70여통이 자유당 정권 때 낸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앞으로 50여 통, 나머지는 장관 앞. 백성욱·조봉암·장택상 등 당대 국정책임자 치고 진정서 한 통 안 받은 이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미군정장관 「하진」에게까지 『식량배급 잘하라』는 진정서를 직접 갖다 냈다.
민주당 정권 때도 물론이었다. 윤보선 대통령에게 1번, 장면 총리에게 2번. 5·16후엔 장도영 수반에게 꼭 1통 내고 10년간 붓을 놓았다가 지난해 11월 다시 두루마리를 펴기 시작했다.
『그 동안 기대를 걸어 붓을 놓았었지만 눈을 감기 전엔 마지막 일 것 같아 새로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변.
지난해 11월4일부터 19일까지 보름동안 하루에1건씩 국무총리와 관계 부처에 연속적으로 두루마리를 올렸다.
『이중 곡가제를 실시하라』 『유흥업소를 줄이라』 『인삼을 많이 수출하라』 『분식을 권장하라』 『행정기구 축소하라』 『도시 비대를 막아라』 등등 전문15신. 그리고는 「진정서 공개문」이란 사륙판 책자를 만들어 각계에 돌렸다. 말하자면 진정서 「시리즈」를 마치고 단행본을 냈다고 할까?
전 영감의 상소 생활은 노익장이다.
아침 6시면 기침. 노인이어서 잠이 적다. 반려 김병천 여사(76)가 머리맡에 갖다 놓은 조간을 펴든다. 처음부터 훑어 내려가다가 7시 정각 「라디오·다이얼」을 맞춘다.
눈이 나빠진 뒤로 더욱 소중해진 고물. 심심한 탓도 있지만 온종일 「라디오」를 듣고 신문을 뒤적인다. 판에 박은 나날. 그러면서도 세상사가 자연 훤하다.
그러다가 큰 비라고 생각이 되면 벼루를 갈고 두루마리를 편다. 진정서를 쓰기 위해서다. 속도는 이틀에 1장 꼴. 반드시 뒷받침할 통계를 꼼꼼이 곁들이기 때문에 좀 느리다. 지난해 11월 진정서 「시리즈」를 낼 때도 그랬다. 초고 잡기는 4월. 연감을 빌어다 놓고 통계를 세밀히 밝히며 한달 꼬박 썼다.
-제1신. 제목 『농촌정책에 대하여』 『농민이 농사만으로 수입이 적어 도시로 몰립니다. 일본은 1억 인구에 동경이 1천만명, 미국은 2억4백만에 「뉴요크」가 1천4백11만 명, 영국은 9천만에 「런던」이 8백만입니다. 제일 큰 도시인구가 전체의 10%를 안 넘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3천80만명 중 서울에 5백30만명이 삽니다. 그래서 도시에는 판잣집이 늡니다. 농공병진이 돼야합니다.』 이런 식의 진정서를 15통이나 썼다.
경신중 3년 중퇴에 경성 부기 전수교 졸업, 본직은 일제 때 잠시 문필 생활을 했다지만 집 장수. 젊은 시절엔 집장사로 돈을 벌어 서울에 1백50채를 가지기도 했으나 지금은 자식들 교육에 다 없애고 방4개 짜리 낡은 한옥1채와 고향(충북 청원군 강내면 다모리)에 땅마지기 약간뿐.
자그마치 10남매 중 맏아들은 미국에서 영주하고 나머지도 모두 출가했다. 남은 식구는 부인 김병천씨와 막내아들 홍기군(24·서울대 공대 금속과2년) 단 세 식구. 고향 땅마지기에서 조금 올라오는 양식과 공무원인 2남 윤기씨에 기대어 조촐하게 산다.
전 영감은 문외한인 분야가 많지만 한가지라도 충고가 될까하는 소박한 충정에서 이 같은 진정작업을 해 나간다고 했다.
방관자가 되기엔 소박한 충정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상소평생」을 풀이했다.
전 영감은 나라뿐만 아니라 친구에게까지 두루마리를 잘 띄운다. 『아랫목을 쓸더라도 나라 한구석을 쓴다고 생각하자.』 무엇이든 나라 생각하라는 한마디는 꼭 써넣는 성미다.
이렇게 해서 띄운 편지 통수는 꼬박꼬박 공책에 치부했다. 65년 1천9백13장, 66년1천9백30장, 70년 3천56장, 71년 11월까지 2천1백21장. 지난해 연말에 띄운 연하장 끝 구절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가지만이라도…』라는 글귀를 썼다. <김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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