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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바도르·아옌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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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작년 11월 칠레에 자유선거를 통한 최초의 합법적인 마르크시스트 정권이 수립됐을 때부터 전세계는 과연『디모크러시 하에서 마르크시즘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정치학의 고전적 명제를 놓고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성립된「사회주의정권」이 민주적 헌정의 테두리 속에서「사회주의국가」로까지 끌어올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 주목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71년은 집권 1년을 맞는 살바도르·아옌데 정권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한해였다.

<주요산업 국유화로 활기>
그러나 아옌데 정권의 시책 l년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는 당초의 예상대로『경제적 사회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병행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를 다시 한번 세계에 인식시켜 줬을 뿐 그의 집권 14개월은 시련으로 일관된 인상을 주고 있다.
70년9월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삼 전 사기, 가까스로 승리를 거둔 아옌데는 야당이 지배하는 의회와 다루기 힘든 칠레의 보수관료 틈바구니에서 숨가쁜 출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쿠바, 페루등 대부분의 남미 좌파정권이 그랬던 것과 같이 집권과 동시에 외국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며 대규모의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미국인 소유의 광산·은행을 접수하고 저소득층의 임금을 인상하여 구매력을 증대시키고 공공사업에 대한 정부투자를 확대하고 물가를 동결하여 만성적인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칠레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어 그는 섬유·양조·시멘트·전자제품 등 32개의 주요업체를 국유화하고 1천3백 여명의 대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몰수, 가난한 농민에게 재분배했다.
그의 이러한 정책을 전임 프레, 이 정권이 6년간에 걸쳐 시행했던 일을 단1년에 해치웠다는 칭찬을 받을 만큼 노동자·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최근 25일간의 친선 방문 차 이곳을 들렀던 쿠바수상 카스트로까지『진정한 사회주의는 칠레에서 진행돼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칠레경제는 호전돼, 연37%로 뛰던 물가가 18%로 급락하고, 8.3%에 달하던 실업률이 4.8%로, 연 7%의 GNP성장을 이룩했다고 아옌데 정부는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유산 층 본위로만 짜여진 산업구조와 분배제도의 근본적 개혁 없이 단행된 경제정책은 점차 거부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인 소유의 동 광 접수는 아옌데 집권초기 7억5천만달러에 달하던 미국의 투자를 5천만달러로 격감시켰고, 외국인기술자의 철수 및 국내기술자의 해외출국으로 생산량마저 감소됐다.
더 우기 동의 국제가격이 하락하여 이 나라 국민들의 젓 줄이며 달러 수입의 70%를 차지하던 동 수입이 23%나 줄어들었고 토지개혁으로 인한 농업생산성 저하는 식료품수입에만 3억 달러의 거액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마침내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시에 식료품을 비롯한 생활필수품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동 생산감퇴, 위기 맞아>
고기는 시장에서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커피·우유·야채 등도 나오기가 무섭게 매진돼버리고 암시장만이 날로 번창해 갔다.
물가는 부르는 게 값이고 사업가는 돈을 외국으로 빼돌릴 생각만 했다.
나날이 뛰는 물가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은행에 맡기려 하지 않았고 수입그대로 몽땅 써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혼란의 책임을 일부 악덕상인들의 매점매석 행위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드디어 격분한 주부들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지난12월초 약 1만5천을 헤아리는 부녀자들이『먹을 것을 달라』는 구호아래 빈 남 비와 밥통을 뒤집어 쓴 채 산티아고 시가를 누볐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일단 위기를 수습했다.
이와 같은 경제적 혼란에 덧붙여 최근 실시된 산티아고 고등학교 자치위원회 위원선거에서 15명의 위원 중 10명이 우파에 돌아간 사실은 아옌데가 이끄는 좌파연합전선에 정치적 타격을 가했다.
좌파의 온상이라고 지목되던 이곳에서 당한 패배는 지난7월의 지방의원선거에서 당한 그것보다 몇 배의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거듭된 선거패배는 그의 연합전선 내에 심각한 분열을 일으켰다. 특히 MIR(혁명좌파운동) 을 중심으로 한 소수 과격파들은 현 정의 테두리 속에서는 진정한 혁명이 수행될 수 없다고 주장, 급진적인 사회주의정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이 지향하고있는 혁명노선의 목표와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옌데 정권은 그 성립과정이나 목표를 향한 수단방법에 있어서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

<연합전선도 분열기미>
그 자신 철저한 사회주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는 아옌데는 카스트로가 폭력주의에 의한 정권쟁취를 꾀 한데 반해 합법절차에 의한 혁명을 추구해왔다.
따라서 그는 카스트로가 취했던 농지개혁·국유화·언론탄압·정보정치의 정책을 일부 모방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와 속도 면에서 민주적 원칙을 배제하지 않으려 노력한 것도 사실이다.
이밖에도 그는 카스트로가 단행했던 노 농 적군으로의 군부개편작업에는 전혀 손도 대지 않았다는 것이 또 다른 차이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남미제국의 군부가 일반적으로 정치문제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는데 비해 칠레 군부만은 직업군인으로서의 중립성을 견지해왔다.
칠레가 남미각국과는 달리 1932년이래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해 나올 수 있었던 큰 이유중의 하나도 바로 군부의 이러한 태도 때문이었다.
아옌데는 취임이래 군인의 봉급을 인상하고 해외출장을 자주 시키고, 큰 행사나 퍼레이드가 있을 때만은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해왔다.

<73년 총 선에 운명 걸어>
그러나 군부는『헌법의 최후 수호자』라는 입장에서 한치의 발도 떼지 않고 있다.
카스트로가 다녀가고, 일본자본의 진출을 권유하며 군부에 대한 최대의 호의를 베풀고 있지만 아옌데 정권의 전도는 반드시 낙관만을 허용하는 것도 아니다.
이제 아옌데 정권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30여 억 달러의 대외부채를 채권국과 재협상을 벌여 해결하거나 지불유예결정을 내림으로써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하고 아울러 73년의 의회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는 일이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그 어느 것도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아옌데 정권의 출현으로 정변과 폭력만이 난무하던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합법적인 정권교체라는 새로운 기풍이 전파돼 새로운 패턴을 제시한 점은 확실히 주목할만한 일이었으며 이러한 기풍은 벌써 최근에 실시됐던 우루과이 총 선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바 있어, 아옌데 정권의 성패를 둘러싼 세계의 관심은 더욱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고흥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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