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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문화 심포지엄 (37)|「가톨리시즘」의 현대 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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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사회=오늘의 주제는 「가톨리시즘」의 입장에서 보시는 현대적 윤리관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해서 이렇게 말씀을 듣게된 것은 더욱 뜻깊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먼저 「가톨리시즘」윤리관의 기초와 본질이 무엇인지 근원적인 문제부터 부탁드립니다.
백=「가톨리시즘」이 보는 인간관이라고 할까. 그것은 이성·육신 그리고 역사성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 있읍니다.

<인간을 역사 속에 동참>
다분히 희랍 정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중세에 있어서는 인간과 이성과의 관계를 중시하나 육체적인 측면을 경시해온 경향이 없지 않았읍니다.
이것은 심리학의 발전 과정과 비유될 수도 있읍니다.
「프로이트」이전엔 이성 중심적인 것이었읍니다.
「가틀리시즘」의 윤리관과도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프로이트」의 심층 심리학이 출현한 뒤로 육신의 문제가 크게 제기됐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성과 육신이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세계성이란 그와 같은 두 가지 속성을 지닌 인간이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적인 요소를 향해 발전 도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동적인 개념이지요.
최=다시 말하자면 이성과 육신이란 두 가지 원리는 정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를 하나로 종합했을 경우 「현상」 (피노미넌)이란 동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현상」이 다름 아닌 역사성이지요.
사=널리 보급된 상식으로는 신의 의사의 발전이 「가톨리시즘」의 사관이 아닙니까?
최=같은 얘기가 됩니다. 인간이 역사성 속에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 내면의 신적인 요소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성인데, 여기에는 언어와 풍습, 그리고 전통의 계승이란 문제도 포함됩니다. 현대적인 해석을 가하자면 「현상」은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을 역사속에 「동참」(참여) 시킨다는 뜻입니다.
추기경=왜 인간에 대해서 윤리를 말해야 되는가? 그것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신적인 요소>
윤리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하필 「가톨리시즘」의 윤리가 따로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의문도 나오겠지만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핵심적인 사상을 이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회적인, 계급적인, 피상적인 면에서의 평등 그리고 빈부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성 불가침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존엄성의 근거는 무엇이냐. 존재의 근원과 목적이 하느님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 안에 신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인간 안에 신의 모습이 있다고 표현합니다. 인간은 신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말도 바로 이러한 뜻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이란 어떠한 외부 세력, 가령 국가의 힘으로도 침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존엄성을 부정한다면 인간의 주체성 없는 상대적인 존재가 되고 말 것이며 국가체제나 「이데올로기」의 수단 내지는 도구로 전락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사물로 전락되고 있는 경우를 공산 국가와 같은 전제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한편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서도 질적으로는 다르지만 유사한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가령 인간을 생산의 도구로, 권력의 대상으로 또한 향락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를 통틀어 인간 상실·인간 소외 등 인간의 본연을 잃은 상황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존엄성을 해치며 부정하는 모든 요소·병폐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곧 「가톨리시즘」의 윤리 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유=지금 말씀하신 윤리 규범은 결국 인간이 하느님께 봉사키 위한 것이며 최고의 가치 질서이기도 합니다.
이 가치 질서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말한다면 하느님-초자연적-자연적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주체적으로는 인간이 갖고 있는 초자연적인 요소와 자연적인 요소로써 악을 극복해야한다는 의미지요. 그것을 인간의 양심이라고 합니다.
최=가치·윤리성에 대한 판단 능력이지요.
따라서 「양심의 교육」이란 개념이 도출될 수 있으며 「가톨리시즘」에서는 이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교육을 통해서 양심을 계발하고 더욱더 성장시키자는 것입니다.
사=「가톨리시즘」의 윤리관의 실천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오늘날 전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할 것인지 좀더 구체적인 문제를 들었으면 좋겠읍니다.

<정신적 요소 억압 부당>
추기경=아까도 언급했듯이 인간은 근본적으로 윤리적 존재입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할 책임과 권리가 있읍니다.
즉 성취해야할 인간을 내재시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뭣인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 그 가운데서도 선행적인 조건은 의식주의 보장이지요.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보장, 종교·언론의 자유 등 기본적인 자유가 이룩돼야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 상황에서 볼 때 공산 체제하에서는 정신적인 기본 요소가 억압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체제에 있어서도 이른바 현대의 「메커니즘」, 정신적 요소를 침식하는 여러 가지 병폐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의 위기라는 말이 있지만 이를테면 물질 만능 사상, 기계와 기술의 발전 등으로 말미암은 소외 현상 등이 인간 상실의 저변에 깔려있다는 것입니다.
사=우리 나라의 현실을 살펴볼 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신 서구 문명의 위험의 양상이 매우 우려할만한 부작용과 영향을 이미 끼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읍니다.
더구나 문제가 복잡한 것은 우리 자신이 역사적·전통적으로 간직해온 혹은 탈피하지 못한 갖가지의 부정적 가치, 예를 들면 봉건적 의식구조·비합리적 사고방식 등등이 그러한 서구 문명의 부정적 가치와 겹쳐서 상승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추기경=비단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본래 인간이 무엇이냐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었읍니다. 이것은 동·서양의 사상적인 차이이긴 합니다만 동양엔 「퍼슨」(person)의 개념이 없습니다. 흔히 인격이란 말로 번역을 하는데 인격자와 같은 의미로 오용되기도 하지요.
개체로서의 인간이라고 할까, 하긴 서구서도 철학적인 개념으로 들어가면 대단히 어려워집니다만. 아뭏든 동양에 있어서는 인간을 항상 사람과 사람과의 관심 속에서, 그것도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부자지간 가족 중의 나 (자아), 집단 속의 인간 등으로 인식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적인 인간관이 사상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민주주의가 소화되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자유인권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지요. 제도만 들여왔지, 그 사상적 내용을 수용·동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안정의 거름>
이와 같은 근본 문제의 해소가 없는 채로 세계 조류 속의 급격한 변화가 파급되어 오는 상황인 셈이지요.
서구 문명의 병폐적인 요소가 먼저 그리고 빨리 들어와서 더욱 정신적인 혼돈을 빚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유산으로 말하면 이조 5백년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당쟁에서 볼 수 있는 상호 불신·모략·중상·배타·이기의 근성 등이 인간 관계의 약점으로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유=한 말로 말씀드려 우리 나라에는 국민을 이끄는 주류적인 사상 체계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다고 할 수 있겠읍니다.
이조 5백년 동안 유교가 거의 국교처럼 군림해왔지만 유교 교리가 민중에 깊이 파고들어 생활화하지 못하고 집권층의 논쟁의 제물 구실을 했다고 하겠읍니다.
서구라파가 그처럼 혼란 속에서도 거의 모든 면에서 안정을 누리게 된 것은 결국 「가톨리시즘」이 밑거름이 되어왔기 때문이라 하겠읍니다.

<제도로 존엄성 보장을>
우리 나라의 혼란도 결국 우리 나라 고유의 확고 부동한 어떤 사상 체계가 하루 빨리 형성되어야 비로소 정치적으로나 윤리·도덕·교육면에도 안정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사=그러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우리의 현실을 개혁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백=교회란 명령에 의한 조직입니다. 그것이 허용될 수 있는 이유는 봉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본다면 과거엔 군주 체제를 지지했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사상은 「루소」로부터 비롯됐다고 할 수 있겠는데 당시 교회는 「루소」의 이론을 반대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민의를 「가톨리시즘」의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됨에 따라 교회도 이 체제가 가장 인간적인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로서 지지하게 됐으며 또 지금도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톨리시즘」이 보는 정당한 정권이란 다음 세 가지의 조건이 구비된 정권입니다. 인권, 사회정의, 그리고 진실입니다.

<재산은 공익 위해 써야>
추기경=「가톨리시즘」은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 가치로 보는 것이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있어서의 공동선이란 문제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최=바꾸어 말하면 사회성이 됩니다. 개인과 전체라는 대립적인 개념 속에서 「상조의 원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추기경=그 상호 관계의 「밸런스」를 어떻게 잡느냐가 문제지요. 우리 사회만 하더라도 그 구조적인 복잡성으로 해서 선과 악, 개인과 공동선이 무수히 엇갈리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를 들면 개인적 소유의 허용은 자유자본주의의 원리이긴 합니다만, 어떤 수단으로 벌였건 축재는 내 재산이다 하는 잘못된 생각이 많아요. 그건 그렇지 않은 겁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재산도 사회성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사용·처분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공익을 위해서 써야 하지요.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
그러므로 사회성에 역행되는 사상에 대해서는 이를 시정하며, 전체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는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두 측면으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추기경께서 새해의 과제를 말씀해 주십시오.
추기경=전번 「로마」의 회의에서도 교황께서 72년1월1일을 「평화의 날」로 정하셨읍니다.
이번 전국 주교회의에서는 주제가 「정의 없는 곳에 평화 없다」는 것이었지요. 세계적으로 현재와 같은 강대국들의 독점적인 지배체제 아래서는 정치·경제·문화 모든 분야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기는 어려우며 따라서 「세계 속의 평화」도 구현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문제와 관련해서 안으로부터 사회정의와 국민의 총화가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적극적인 노력을 계속하면서 교회내의 교육부터 힘쓸까 합니다. 좀더 사회 속의 종교로, 또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제 「가톨리시즘의 현대 윤리」
일시 1971년12월22일 하오 4시
장소 천주교 서울대 교구청
참석자 (무순) 김수환 (추기경)
최창무 (가톨릭대학 교수)
백민관 (가톨릭대학 교수)
유봉준 (창조사 사장)
사회 서기원 (본사 논설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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