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서 37년 만에 돌아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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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굶주림과 추위에 맹수위협도 겹쳐 귀국 때 북괴 마수 뿌리치느라 진땀.
「사할린」은 이제 생각하기도 싫소.』일제의 징용으로 남화 태탄광에 끌려갔다가 37년 만인 지난 8월 15일 꿈에서도 그리던 조국의 품에 돌아온 손치규 노인 (70· 전북 고창군 고창읍 교천리) 은 생지옥 「사할린」올 되돌아보는 것 조차 겁난다고 했다.손 노인이 설창 고향을 둥지고 「사할린」에 끌려간 것은 33세 때인 1934년.한창 나이에 사랑스런 처와3남1녀의 자녀를 두고 생이별했다가 말년에나마 마마할머니가 된 아내 장소아씨 (65) 와 백발의 재회를 한 그는 『운명의 장난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며 허탈갑올 누르지 못했다.
손 노인은 『「사할린 두더지와 진배없었다』고 회상했다.
『광산의 굴을 마다가 종전 뒤 「사할린」 이 소련에 돌아가면서 떨어진 노역을 산속에 놓인 별 4백여개를 지키는 경비 노릇이었죠』
그가 처음 거처했던 곳은 한 대수목이 우거진 첩첩산중에 번지조차 없는데 였다고했다.기온은 풀릴 날 없는 영하30도.그는 이 산속에다 토굴을 파고 외톨로 벌통만 지키며 살았다고 했다.
토굴만 흙과 돌로 얽은 방 한 칸 남짓.워낙 산중이어서『밤이면 곰의 습격이 두려워 눈을 제대로 못 들었고 언제 짐승이 닥칠지 몰라 양말속에 호신용 단도를 신주처럼 지니며 살았었다』 고 했다.그러나 그는 혹한과 맹수 외에 굶주림에도 떨어야 했다고 했다.배급이라곤 감자 한가지뿐. 산나물을 뜯어 허기진 배를 채워야만 했다고 했다.
손 노인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허구한 날 말 한마디 주고 받을 상대하나 없는 의로움에 머 미칠것만 같았다』그 회상했다.번지도 없는 산중에 잦아올 사람이 있을리 만무하고 간혹 같은 신세인 교포들과 통나무를 베는 중노동이 있었을 뿐,허구한 날 입을 봉한 벙어리 생활이 었다는 것이다.
『소련 말은 물론 1차 귀환국인 일본말조차 배울 기화가 없었으며 나중엔 거의 언어기능을 잃다시피 했다』고 했다. 『초년도 송환때 일본말을 못하자 송환을 원치 않는 자로 소련관원에게 오인되어 제의됐다』 며 그 동안의 벙어리생활을 너무나 어처구니없어 했다.그는 공책에 적어둔 「사할린」교포 3백 명의 명단을 뒤적이며 혼자 말을 걸기도 하고 망향의 눈시울을 적신적이 한 두번이 아니라고 했다.
소련 관원의「송환불원」오해를 일본 청삼현 오소천원 시평화정에사는 장남 종련씨(45)에게 편지로 연락, 종운씨가 거의 날마다 일 외무성에 송환을 애소한 끝에 손 노인이 감격의 여권을 받아쥔 것은 지난6월 20일.죽지않고 버틴 보람이었다.그러나 천신만고끝에 송환여권은 넣었지만 운명의 고비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여권이 나오기 며칠 전 손 노인이 아직 송환을 모르고있을 때였다. 토굴에서 1km쯤 떨어진「체쿠」 시에서 30세쯤 된 교포가 느닷없이 찾아왔다.그 청년은 송환 결정을 전하며 생색을 낸 뒤 들고온 소주1병을 나누며 어떻게나 평양행을 조르는지 거절에 진땀을 뺐다고 했다. 끝내 마수를 뿌리쳤지만 교포주소특과 일본서 모조리 압수 된다는 속임수에 넘어가 「트렁크」와 비상금만 남기고 현금을 몽땅 털어 놓아야 했다고 했다.
6월22일 비행기 편으로「를라디브스트크」에 도착,처음으로 안락한 여관 잠자리에 드는가 했을 때 거기에도 또 소련귀화를 권하는 소관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빠져 이튿날 드디어 송환선인 「하바로프스크」호에 올랐으나 버릇처럼 양말 속에 낄러둔 단도가 적발돼 그만 하선 당해 경찰에 넘겨지고 말았다.
손짓 발짓으로 맹수를 그려보였으나 막무가내. 『이때 처자식과도 이승의 인연을 다 하는 것 같아』 명상을 버틴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고 한 손 노인은『그러나 닷새 만에 무사고 생활이 밝혀져 다시 승선했을 땐 날것만 같았다』 고 아슬 아슬했던 마지막 순간을 되새겼다.
부산·광주동지에 흩어져 사는 아들 딸 집을 두루 돌아보고 고창 고향집에서 부인과 가정을 되찾은 손 노인은 『감시가 심해 미처 작별의 인사를 나누지 못한 억류 교포들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린다』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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