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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이 가을 문득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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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28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i, 1828~1910) 명문 백작가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잠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24세 때 『유년시절』을 발표해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부활』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50세 이후 삶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하며 지주 생활을 청산하고 민중의 삶에 동화하려고 노력했다.

한 사내가 동굴 옆 나무에 매달려 있다. 밑에서는 굶주린 맹수들이 으르렁거리고, 위에서는 무시무시한 새떼가 먹이를 찾아 날아다닌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춰 미끄러지거나 새의 발톱에 걸려드는 날이면 그걸로 끝이다. 게다가 저 아래서는 쥐들이 나무 밑동을 갉아대고 있다. 오래지 않아 나무는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나뭇가지 위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이 사내는 어쩌다가 떨어지는 꿀을 핥아먹으며 그 단맛에 즐거워한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47>『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레프 톨스토이

레프 톨스토이는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했다. 가혹한 사고사와 피할 수 없는 자연사의 가능성에 끼여 있으면서도 한순간의 욕망을 채우느라 정신이 없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게 우리 인생이라는 말이다. 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지만 이미 늦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ch)』은 톨스토이가 대작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고 심각한 정신적 위기를 겪고 난 뒤 9년 만에 발표한 것인데, 마치 작가 자신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쓴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실감나는 작품이다. 길지 않은 중편 분량의 이 소설은 나이 마흔다섯의 중견 판사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전해주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그와 친했던 동료 법조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이 자신의 승진이나 자리 이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였다. 그리고 자기가 아니라 그가 죽은 데 대해 안도한다. 냉정하지만 할 수 없다. 그의 아내마저도 똑같으니까. 그녀는 추도 미사에 참석한 고인의 법학교 동창에게 연금을 비롯해 국가로부터 받아낼 수 있는 지원금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톨스토이는 곧이어 주인공의 지나온 삶을 이야기한다.

이반 일리치는 명문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순조롭게 법조인이 되어 평생 안락하고 편안한 길을 추구해왔다. 그런데 새집으로 이사해 벽을 꾸미던 중 옆구리를 다치고 그다음부터 자꾸만 이상한 통증을 느낀다. 하지만 의사들은 맹장이니 신장이니 하면서 진통제만 줄 뿐이다. 또다시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찾아온 어느 날 갑자기 문제가 전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맹장 문제도 신장 문제도 아니야.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이 있었는데 지금은 떠나가고 있는 거야. 떠나는 중이라고. 근데 나는 그걸 붙들 수 없어. 그래 문제는 몇 주일 후냐, 며칠 후냐, 아니면 지금 당장이냐야. 한때 빛이 있던 자리를 지금은 어둠이 차지하고 있어. 나 또한 이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저곳으로 가야 해!”

병세가 악화돼 결국 직장도 나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 고통과 씨름하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본다. 그동안 기쁨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모두 부질없고 추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상류층에 진입하면 뭔가 좋은 게 있을 줄 알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즐거움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뜻하지 않게 찾아왔고 이어진 실망, 아내의 입 냄새, 애욕, 위선! 그리고 이 생명 없는 직무, 돈 걱정, 그렇게 보낸 일 년, 이 년, 그리고 십 년, 이십 년, 항상 똑같았던 삶. 산에 오른다고 상상했었지. 그런데 사실은 일정한 속도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어. 그래 그랬던 거야.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산에 오르고 있었어. 근데 사실은 정확히 내 발 아래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야.”

마침내 그는 자신이 추구해왔던 쉽고 편안한 삶이 실은 위선으로 가득한 삶, 물질적인 행복을 정신적인 행복으로 착각한 삶이었음을 깨닫는다. 동료 판사와 의사들은 물론 아내와 딸까지도 자신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기고 거짓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끼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살아있는 주변 사람들이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도록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그 묘한 전환점은 어린 아들이 만들어 주었는데,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휘젓던 그의 손을 아들이 붙잡아 입술에 갖다 대고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그는 아들이 가여워졌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 주고 나도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돼야 해.”

그러자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바로 이거야! 이렇게 좋을 수가! 죽음은 끝났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톨스토이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는 숨을 한 차례 들이마셨고, 절반쯤 마시다 숨을 멈추고 긴장을 푼 후 숨을 거두었다.”

톨스토이의 작품은 가을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늘 가을이 느껴진다. 그래, 곧 겨울이 닥치겠구나, 죽음도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겠지. 하지만 이건 거역할 수 없는 냉엄한 진실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이 라틴어는 사실 죽음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삶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바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인 것처럼 말이다.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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