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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우승 순간, 독일방송 ‘한국인 학생’으로 불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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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19면

손기정이 시상대에서 월계관을 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1). 당시 마라톤 경기 구간과 통제소 및 급수대(□)의 위치(2). 손기정이 간호사가 건넨 물을 마시거나(3) 일본인 관계자가 전달한 물을 마시는 모습(4).
당시 손기정이 신었던 타비와 같은 모델(5).

11월 15일은 마라톤 영웅 손기정의 기일이다. 2002년에 세상을 떴으니 어언 11년째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2013년 현재까지 일본의 유일한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이기도 하다. 그의 업적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2시간30분의 벽을 돌파해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딴 것이다. 이는 일본제국주의의 강점 통치 아래 놓인 동포들의 울분을 씻는 한편 민족의식을 새삼 고취시켰다는 의미도 있다.

손기정 11주기 …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의 재구성

 ‘역사적 인물’ 손기정은 많은 저술가와 연구자의 주목을 받아왔다. 대부분의 주제는 손기정의 역사적 의미와 민족의식, 일장기 말소 사건 등 주로 인문·사회학적 검토와 평가에 집중됐다. ‘마라톤 선수’ 손기정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2012년 7월, 필자는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마라톤 경주 구간을 실사하고 스포츠박물관과 올림픽 주경기장(Olympiastadion) 등을 방문했다. 수집한 자료를 일 년여 동안 분석·종합해 최근 ‘한국체육사학회지’에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 내용 연구’란 논문을 발표했다.

1. 그날 베를린은 맑고 쾌적했다
대부분의 국내 문헌은 마라톤 경기가 열린 1936년 8월 9일 베를린이 ‘30도가 넘는 고온’에 습도가 높았다고 기록했다. 베를린올림픽 공식 기록은 다르다. 기온은 경기가 시작된 오후 3시쯤 22.8도, 끝났을 때는 21.0도였고 하늘은 맑고 대기는 건조했다.

 30도는 한여름 폭염을 상징하는 온도다. 마라톤 경기가 혹독한 더위 속에 열렸다는 전제는 손기정의 영웅 이미지를 강화하고 그가 거둔 승리의 의미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으리라. 손기정이 거둔 승리는 곧 한민족이 거둔 승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2. 존재하지 않는 비스마르크 언덕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코스는 해발 31.6~80m에 걸쳐 있다. 가장 높은 곳은 출발한 뒤 4.7∼8㎞, 반환점을 돌아가는 길의 33.2∼34.2㎞ 지점. 약 35㎞ 지점에 ‘카이저 빌헬름 툼’이 우뚝 서 있다. 여기서 해발 33m 지점까지 내달으면 40㎞ 지점에 마지막 오르막길, ‘글로켄툼슈트라세’가 나온다.

 여러 문헌에 ‘비스마르크 언덕’이 등장한다. 손기정이 고통스럽게 달린 구간이다. 그러나 공식 기록집에는 ‘비스마르크’라는 지명이 없다. 빌헬름 1세 황제와 비스마르크의 조각으로 장식한 카이저 빌헬름 툼의 이미지가 가공의 지명을 만들게 했을 수 있다. 일본 선수단에서만 통용된 지명일지 모른다. 카이저 빌헬름 툼 근처 또는 글로켄툼슈트라세일 것이다.

3. 미담과 담합 사이, 하퍼의 충고
경기 초반에 영국의 어네스트 하퍼가 손기정에게 “슬로, 슬로, 세이브, 세이브”라고 말하며 페이스를 올리지 말 것을 충고했다는 일화는 여러 책자에 미담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하퍼의 행동은 비신사적인 담합 시도로 해석될 여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손기정도 하퍼의 충고 내지 제안을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경계하면서 달렸다. 손기정은 28∼31㎞ 구간에서 사발라를 제치고 하퍼마저 따돌렸다. 그는 다른 선수에게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시달렸고, 하퍼뿐 아니라 후반에 강한 남승룡도 몹시 경계했었다.

4. 물 공급 받은 지점은 최소 두 곳
손기정은 달리는 동안 물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그는 자서전에 “비스마르크 언덕에 오르니 간호부가 물을 권해 입을 한번 헹구고 뱉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사진 자료는 손기정이 적어도 두 지점에서 물을 공급받았음을 보여준다.

 우선 간호사가 건넨 물잔을 입에 대는 사진이 한 장 있다. 이 사진은 손기정의 자서전에도 실렸다. 올림픽 공식 기록 645쪽에는 일본인 관계자가 건넨 물잔을 입에 댄 사진이 있다. 39㎞ 지점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당시 마라톤 코스에는 대략 3㎞ 간격으로 열다섯 곳에 급수대가 설치되었다. <사진 2>는 처음 소개되는 대회 운영 자료 중 하나로, 급수대의 위치(□)를 보여준다. 손기정은 33.2~34.2㎞ 지점에 있는 열세 번째, 40㎞ 지점을 앞두고 설치된 마지막 급수대에서 물을 공급받았을 것이다.

5. 헝겊에 고무창 댄 타비 마라톤화
손기정이 사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경기복과 마라톤화가 일본 도쿄의 스포츠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기복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세단뛰기에서 금메달, 멀리뛰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다지마 나오토가 사용한 것이다.

 규격은 길이 730㎜, 폭 390㎜, 무게 230g이다. 다지마의 체격은 키 1m71㎝, 몸무게 62㎏이었다. 손기정(1m70㎝, 60㎏)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손기정이 사용한 경기복도 박물관에 전시된 다지마의 경기복과 같거나 흡사했을 것이다.

 박물관은 손기정이 사용한 것과 같은 종류의 마라톤화도 소장했다. 헝겊에 고무 밑창을 댄 이 마라톤화에는 ‘손기정이 신은 타비와 같은 모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타비’는 일본 버선이다. 규격은 길이 235㎜, 폭 100㎜, 깊이 45㎜, 무게 250g.

6. 한·일 정치상황 몰랐던 서구인들
손기정은 베를린올림픽 기간 동안 일장기가 붙은 운동복을 입지 않고 한글로 서명을 하는 등 강인한 민족의식을 드러냈다. 그러나 독일 언론이 이러한 노력에 주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독일역사박물관과 독일방송기록보관실이 소장한 중계방송 실황 녹음 중에 손기정을 ‘한국인 학생(Koreanische student)’이라고 부른 대목이 있다. 당시의 정황을 감안하면 이 언급은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한 결과라고 보기 어렵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시상대에 선 손기정은 우리에게 ‘슬픈 승리자’로 기억된다. 서구인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기록 영화 ‘올림피아’를 제작한 여성 감독 레니 리펜슈탈의 기록은 손기정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반영한다. 리펜슈탈은 “그들은 종교적인 희열(喜悅)에 빠진 것 같은 모습으로 자국의 국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녀가 보기에 손기정은 망국의 한에 사무친 한국인이 아니라 애국심 충만한 일본인이었다.
 
 손기정 연구는 깊고 높은 산을 오르는 일과 같다. 필자가 한 일은 어지러운 덤불을 걷어내는 작업이었다. 덤불이 사라지자 손기정의 거대한 윤곽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쓰라린 일제 강점의 시대에 우리에게는 세계최고기록 보유자 겸 올림픽 챔피언, 위대한 마라토너 손기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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