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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맥아더」원수 해임(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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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사라지는 노병>(1)
1951년 3월 중순에 「트루먼」대통령은 한국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중대결정을 내렸다. 물론 이것은 「맥아더」가 주장한 것 같은 「완승」이 아니라 「유엔」동맹국의 의향에 따른 「휴전」을 통한 종전 결정 안이었다. 이 무렵에 「유엔」군은 남한에서 공산군을 내몰고, 전선은 대체로 38선 부근에 머무르고 있었다. 따라서 「트루먼」행정부와 「유엔」참전국들은 전전상태에서 한국전쟁을 끝낸다면 개입초기의 목적도 달성되고 그런 대로 체면도 설 것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 보면 「트루먼」대통령의 한국전쟁에 대한 정책은 좋게 말하면 「현실적인 탄력성」이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일관성」이 없었다고 하겠다.
북괴의 남침직후 미국과 그후 추인된 「유엔」의 한국전 개입목적은 『무력침략을 격퇴하고 「이 지역」(in the area)에 평화와 안전을 회복한다』고 성명함으로써 6·25 전의 원상복귀를 꾀하겠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유엔」군이 전세의 주도권을 쥐자 「유엔」결의안의 「이 지역」을 「한국전역」으로 확대 해석하여 통한으로 개입목적을 수정하였다(주=본 연재 19·185회 참조). 물론 미국이 지배한 「유엔」도 이 확대해석을 추인 했다.

<38선 넘어 진격 않도록 훈령>
그러나 중공대군이 개입하고 「유엔」 참전회원국들이 발목을 잡자 「트루먼」대통령은 다시 개입초기의 목적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러니까 「트루먼」으로서는 한국전쟁정책을 두 번 바꾼 셈이었다. 차라리 「트루먼」대통령이 한국전개입초기의 목표대로 인천상륙 후 38선 돌파 때 「맥아더」에 제동을 걸었더라면 「아시아」에서의 미국위신도 덜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한 국가가 전쟁을 치르는데 있어 양수 관계에 있는 「정치」와 「군사」와의 조화가 얼마나 힘든가를 나타낸 한 예이기도 했다. 아뭏든 「맥아더」의 「강인」과 미 국방 국무성의 『「유럽」제일주의자』들 틈바귀에 낀 「트루먼」대통령은 후자의 생각인 원점으로 되돌아가 한국전 해결을 모색하게되었다. 이래서 1951년3월20일에 「트루먼」대통령은 「딘·애치슨」국무 「조지·마셜」국방 「오머·브래들틴」합참본부의장과 협의하고 「맥아더」원수에게 「브래들리」원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남한의 대부분지역에서 침략자들이 격퇴됨에 따라 국무성은 「유엔」이 한국문제해결의 여러 가지 조건을 토의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대통령의 성명을 멀지않아 발표할 것을 계획하고있다. 「유엔」에서는 「유엔」군 주력부대를 새 이북으로 진수시키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일층 외교적 외력에 선행되어야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외교적인 반향을 가려내고 그 후에 나타날 새로운 협상을 허용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여유가 필요하다.』
이 「메시지」는 한국에 들어온 중공군에 대해 인천 상륙전 보다 훨씬 대규모의 『섬멸작전』을 계획하고 있는 「맥아더」에게 작전을 일단 중단하고 얼마동안 기다려보라는 통고와 마찬가지였다.
한편 「트루먼」대통령은 「브래들리」원수로 하여금 「맥아더」에게 이와 같은 일종의 『부전통고고려』를 보내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할 참이었다.
『본인은 「유엔」에 의해 한국에서의 통합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요청 받은 미국정부의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유엔」참전회원국과 충분히 협의한 후 다음과 같이 성명 한다. 주한 「유엔」군은 대한민국에 대해서 감행된 침략을 물리치고 있다.

<휴전 협상할 용의 있다>
침략자들은 그들이 지난해 6월 불법적인 공격을 시작했던 지역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고 후퇴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1950년6월27일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결단한 조건에 따라 이 지역에 국제적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평화를 원하는 모든 국가들은 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는 데 대한 바탕을 마련했다. 「유엔」군 총사령부는 전투를 종결시킬 협정을 맺을 용의가 있다. 그와 같은 협정은 외국군대의 철수를 포함한 한국문제를 더욱 더 폭넓게 해결할 길을 터놓게 될 것이다. 한국 민은 평화를 누릴 권리가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선택에 따라 그들의 정치 및 그 밖의 제도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
이제 한국에 필요한 것은 평화이다. 한국에 평화가 오면 「유엔」은 한국의 창조적인 부흥사업에 그 자원을 사용할 것이다. 한국문제의 신속한 해결은 극동의 긴장상태를 크게 완화시킬 것이며 그 밖의 다른 세계문제 토의에 대한 길을 터놓게 될 것이다.』
이 성명은 사실상 「유엔」을 대표하는 미국이 상대방에 대하여 위협이나 보복이나 또는 처벌에 언급함이 없이 한국문제를 해결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비친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침략의 선수를 썼다가 실패했으며 「유엔」도 그들대로의 수단을 사용했다가 실패했다. 한국에서 아무도 정말 패배한 편은 없으며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
「트루먼」은 공산주의자들이 동의한다면 6·25 전의 상태로 한국전을 종결짓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수십 만 명의 남녀노소와 민간인·군인이 죽거나 병신이 되고 집을 잃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았다. 이 전투와 고통과 죽음 끝에도 모든 것은 옛날 그대로였고,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그런데 「트루먼」의 이 같은 중대 성명은 기초만 했을 뿐 발표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맥아더」원수는 「워싱턴」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트루먼」성명에 앞질러 중대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조셉·마틴」의원에 보낸 서한(주=본 연재 256회 참조)과 함께 「트루먼」대통령으로 하여금 「맥아더」해임을 결심케 한 3월24일자의 원수성명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작전은 예정과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한국정복에 혈안이 된 중공군을 실질적으로 남한에서 몰아냈다.
우리 공군의 쉴새 없는 폭격과 해군의 함포 사격으로 적 보급로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전투를 지탱해 나갈 요건이 부족하다는 점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우리의 전술적인 성공보다 더욱 의의가 큰 것은 그처럼 자랑했던 군사력을 가진 이 새로운 적 중공이 현대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중요군수품을 마련할 공업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중공이 한국에서의 선전포고 없는 전투에 끼어 든 이래 이러한 군사적 약점은 확실히 드러났다.

<대통령에 공공연한 도전>
「유엔」군의 활동을 제약하고 그만큼 중공에 군사적 이익을 주는 현재의 제한 조치 하에서도 중공은 무력으로 한국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유엔」이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한다는 관대한 노력을 버리고 일거의 작전을 중공연안이나 내륙지역까지 확대하기로 결정한다면 중공은 반드시 군사적 붕괴에 직면하게 될 참이다. 문제의 군사적인 측면과는 별도로 기본적인 문제는 역시 정치적 성질의 것이며 외교분야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야한다.
그렇지만 본인은 「유엔」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 안에서 언제라도 적 군사령관과 회담하여 이 이상의 유혈 없이 한국에서 「유엔」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어떤 군사적 수단을 찾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용의가 있다.』
성명은 「군사령관 권한 범위 내에서」나 「군사적 수단」 등의 표현을 썼지만 분명히 정치적 발언이며 「워싱턴」이나 중공에 대한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과 동맹국들의 전군사력이 중국본토작전에 동원될지도 모른다고 암시했다. 그리고 중공의 약점을 지적하는 데 있어서는 「합법」의 냄새가 풍겼고, 이는 분명히 원수가 좋아하는 식의 위험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성명을 읽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초되어 막 공표 하려던 자기성명과는 전혀 상치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때의 놀라움과 분노를 자서전(Memoirs, by Hary S. Truman)에서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외교정책에 관한 어떤 견해표시도 삼가라고 미리 주지시켰는데도 원수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런 성명을 내놓았다. 그것은 대통령 겸 미 육해공군 총사령관인 내 명령에 대한 공공연한 반항이었다. 또한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권한에 도전이며 「유엔」정책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 더 그의 불복종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3월24일자의 「맥아더」성명은 앞서의 「트루먼」의 「원자탄성명」만큼이나 「유엔」내의 미 동맹국들에 충격을 주었다. 「트루먼」이나 「애치슨」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실제로 한국 야전을 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든 성명 사전승인 받도록>
만주폭격과 본토 해안 봉쇄가 임박한 것이 아닌가? 「워싱턴」에는 동맹국들로부터 문의의 전보가 쇄도하고 대사들은 국무성으로 몰려갔다. 이래저래 「워싱턴」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몰려 해명에 진땀을 뺐다. 「트루먼」은 「맥아더」성명이 발표된 직후 「애치슨」장관을 비롯한 「딘·러스크」「로버트·로베트」의 국무성고관을 불러들였다. 1950년12월6일에 「유엔」동맹국이 미국말을 잘 안 듣고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자 「트루먼」대통령은 이들을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맥아더」에게 모든 공문성명은 사전에 「워싱턴」의 승인을 받도록 지시했었다.
「트루먼」은 이제 그 지시내용을 낭독하고 「애치슨」과 「러스크」에게 이 「지시문」에 불분명한 점이 있느냐고 물었다. 둘의 대답은 너무도 분명하며 아무런 의문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모임이 있은 후 국무성은 「맥아더」의 월권 적 발언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합참본부에서는 12월6일의 대통령명령을 상기시키는 강경한 「메시지」를 다시 「맥아더」에 보냈다. 그러나 그런 「메시지」를 보낼 필요는 없었다. 「유엔」군사령관으로서의 「맥아더」의 정치발언은 3월24일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주요일지(1951년4월2, 3, 4일)
※4월2일▲「유엔」군, 서부 전선에서도 38선돌파▲국회, 38선 휴전안 반대결의
※4월3일▲미 「제트」기 80대, 신의주출격▲「맥」원수, 14회 째로 한국전선시찰▲정부, 수복지역의 적성통화회수▲중공지, 한국전의 조기종전은 무망이라 보도.
※4월4일▲국군, 간성 점령▲적기11대격대파▲안양·원주이남의 피난농민에 귀향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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