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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제22화>부산통화개혁(2)|김유택<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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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은행권 교환>
남침을 감행한 북괴는 침범지역 내에 괴뢰인민권을 강제로 통용시켰다. 한편 한국은행이 인쇄만 해두고 아직 발행하지 않았던 A기호 조선은행 천원권을 불법 발행하는가 하면 조폐시설과 기술자를 징발, 48A기호 조선은행 백원권을 인쇄, 남발하기 시작했다. 북괴는 이같은 방법으로 침범지역의 경제질서를 교란했고 이 약탈 은행권을 공작자금으로 「워커·라인」(포항∼영천∼대구∼창녕∼마산∼통영을 연결하는 한국군최후방어선)안의 일부지역에까지 뿌리기도 했다.
정부는 이러한 북괴의 기도를 봉쇄하고 당시 「맥아더」사령부의 요청도 있어서, 국군의 반격개시를 앞둔 50년8월28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0호 「조선은행권의 유포 및 교환령」을 공포, 적침으로 오손된 조선은행권을 깨끗한 은행권으로 교환키로 했다.
이 조치는 5회까지 있었다. 제1회 교환은 50년9월15일부터 22일까지 8일간 적이 침범하지 못한 「워커·라인」내의 지역에서, 제2회는 10월25일부터 11월3일까지 10일간 서울특별시 경기 및 강원도일원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즉 제1회 교환은 반격작전에 앞서 최후방어선내의 통화를 경비한 것이며 제2회 교환은 9·28 서울수복 한달 후 수복지구의 통화를 재정비한다는데 목적을 둔 것이다.
이어 11월11일부터 18일까지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 등 남은 지구전역에 대한 제3회 교환으로 했다. 그러나 전남북 일대는 치안상태가 혼란하여 반 이상의 지역에 교환이 불가능했다. 한은전주지점이 50년10월30일 본점에 제출한 「조선은행권 교환사무의 전망」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시·읍·군·면소재지 이외의 곳은 단적으로 표현해서 인민공화국이다. 치안이 불안하고 교통·통신사정이 불순하여 교환사무가 원활히 진행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중략)지금도 농촌지대는 A「노트」(천원권)가 유통되고 있고 무지몽매한 백성일지라도 적성통화를 알고 있으면서도 유통을 강제 당하고 있다. 농촌의 유일한 재산인 농우가 A「노트」로 거래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이어 이곳에서도 곧 A「노트」의 사용이 금지될 것이라는 소문을 뒤늦게 들은 농민들은 통곡하고 있다.(중략)참혹한 농촌경제의 희생을 적게 하기 위해서는 교환조치의 지연 또는 사전의 공비소탕작전이 있어야하겠다.(하략)…』
그래서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치안상태의 회복에 따라 수시로 특별교환(제4회 교환)을 실시해 왔는데 교환을 무제한 연기하면 끝낸 지역의 조선은행권이 유입할 염려가 있어 51년4월30일로써 일단 교환조치를 마감했다. 그러나 제4회 특별교환 이후에도 여전히 수개 군의 미 교환지역이 남게되어 이들 지역에 제5회 특별교환조치를 51년9월24일부터 실시, 53년1월16일에 완전히 끝마쳤다.
이 교환과정에서 인민권과 A기호 조선은행원권은 일단 은행에 예입 받았다가 일체 상환해 주지 않았고 다만 48A기호 백원권만 한은권으로 바꾸어주었다.
그 이유는 인민권은 북괴통화니까 아예 말할 필요조차 없고, A기호 천원권은 남한에서 발행한 사실이 없는 것을 북괴가 불법 발행, 유통시킨 것이므로 합법적인 한국의 법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 천원권은 색채·형태 및 모양으로 보아 일반이 종래에 쓰던 천원권과 쉽게 구별할 수 있었으며 이 적성통화는 괴뢰군이 침범할 당시에도 선량한 국민들이 사용을 거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48A기호 백원권은 진권의 인쇄에 사용하던 원판·용지·안료 등과 기술자를 북괴가 징발, 인쇄한 것으로서 『탈취된 미 발행권』의 성격을 지닌 것이며 현찰취급에 상당한 경험을 가진 사람도 진권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48A기호 의위권은 국민재산 보호 적인 견지에서 유효성을 인정키로 했던 것이다. 더구나 48A기호 의위권의 동결예금은 대부분이 3만원이하의 소액예금자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1회 교환에서는 신·구 은행권의 무제한 등가교환을 해주었으나 2회 교환 이후부터는 적성통화거액소지자의 대량교환을 막기 위해 약간의 제한조치를 가했다. 가구 당 2만원까지는 현금으로 교환하고 초과분은 지정금융기관에 예치, 주2만원, 월5만원이내로 인출을 제한했다. 그 대신 지불제한예금에 대해서는 예금주의 희망과 선택에 따라 예치금융기관의 변경을 허용했고 또 이 예금에 의한 예금주 명의의 대출금결제와 공과금 납부를 인정해주었다.
한편 1회 및 2회 교환에 있어서는 교환 마감일까지 교환대상인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허용, 일시적인 국민생활의 곤란을 없애려했으나 이는 도리어 환물사상의 자극, 신·구권간의 「프리미엄」거래발생 등 소망스럽지 못한 부작용이 일어나 3회 교환에서는 실시 첫날부터 남한전역에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금지했다.
이같은 교환조치결과 총7백19억3천3백만원이 교환됐고 미회수분은 약50억원이었다. 교환내용은 현금교환 5백34억8천4백만원, 예금수입(수입) 1백58억4백만원, 금융기관 시재금 기타 26억4천5백만원으로 집계됐다.
이 조치는 원래 군 작전의 일부로 실시됐으며 적의 공작자금잠입을 막아 경제교란음모를 분쇄했다는 점에서 전쟁수행에도 큰 도움을 줬고 경제면에서는 1백58억원에 달하는 예금을 흡수했기 때문에 전비지출에 따른 「인플레」작용을 그만큼 상쇄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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