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54)|맥아더 원사 해임(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웨이크도 회담의 성격이나 목적에 대해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원사는 서로 상반되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전자는 맥아더가 마땅히 워싱턴에 와서 대통령에게 군무를 보고해야 되지만 하도 바쁘다기에 웨이크 도에까지 가서 만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회담의 가장 핵심이었던 중공과 소련개입 가능성에 대해서 맥아더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단언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맥아더와 그의 측근자들은 회담의 의제나 목적에 대해서 전혀 사전에 연락 받지 못했으며 분명히 트루먼 대통령은 11월의 중간 선거를 앞두고 인천 상륙과 북진 등의 군사적 승리를 웨이크 회담을 통해 민주당의 정치적인 선거 전략으로 이용하려고 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중공과 소련개입문제에 대해서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지 단언한 것은 아니며 그때는 본국의 국무성이나 CIA(중앙정보국)도 이점에 있어서는 나와 똑같은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번에는 웨이크도 회담에 대한 후자의 견해를 맥아더 회고록(The Reminiscences of Douglas Mac-Arthur)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대만 문제는 논의도 안돼>

<내가 웨이크 도에서 인디펜던스 호로부터 내리는 대통령과 악수할 때에 그는 『정말 오래간만이군요』라고 말을 건넸다. 나는 『이 다음에는 좀 여유 있게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둘이 「이 다음」에 만날 기회는 영원히 없었다. 대통령은 회담 때 역사적 지식을 번번히 내세웠는데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지만 사실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을 갖고 있을 뿐, 그 사실의 배후에 있는 논리나 원인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은 아시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르며 역사를 왜곡해서 보는 버릇이 있는 듯이 보였다. 대공투쟁에 있어서도 어떻게 승리하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많은 고관을 데리고 왔었다.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아더·래드퍼드 제독, 육군장관 프랭크·페이스, 대통령 공보관 찰즈·로드, 유엔 대사 피립·제섭, 합참본부의장 오머·브래들리, 특별 고문 애버럴·해리먼, 법률 고문 차즈·머피 등이었다. 이 밖에도 대통령의 보좌관이나 보좌관의 또 보좌관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내 수행원은 군사보좌관과 부관, 그리고 비행사뿐이었다. 회담 내용은 기록하지 않는다고 로드 공보관이 말했다. 회담자체는 대체로 무난한 것이었다.
의제 가운데는 일본에서의 점령군 사령관과 한국에서의 유엔 군 총사령관으로서의 내 직책에 관련된 것이 있었는데 이 문제 역시 벌써 오래 전에 내 견해를 워싱턴에 제시해 놓았던 것이다. 이 밖에 통일 후의 한국행정과 부흥, 전쟁 포로 취급, 비율빈의 경제 사정, 인도차이나 정세, 대일 강화 조약의 진전상황 등도 의제로 올랐으나 모두 내 입장은 전에 워싱턴에 통고한 것들이었다. 회담을 통해 새로운 정책이나 전략이나 또는 국제적인 정치문제 같은 것은 제안도 되지 않았고 논의의 대상에도 들지 않았다. 대만 문제는 입 밖에도 오르지 않았었다. 회담 끄트머리에 가서 거의 덤이나 마찬가지 형식으로 중공개입 문제가 제출되었다. 중공은 한국전에 개입할 일치된 의견이었다.
이런 견해는 당시 이미 중앙정보국과 국무성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분명히 이렇게 내 견해를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한 내 해답은 현재로서는 억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 한다.
국무성이나 CIA는 중공개입 징조에 대해 나에게 아무런 보고도 없었다. 내 휘하의 정보기관에서도 압록강 건너편에 중공군대부대가 집결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 동태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군사적 판단으로는 우리 공군력이 현재 압도적이며 압록강의 북방과 남방에서 상대만의 공격기지나 보급로를 뜻대로 파괴할 힘이 있는 이상 중공대부대가 한반도에 투입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런 행동은 보급부족으로 전멸 당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누구도 나의 이런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나의 이런 발언이 후에 내 입장을 일부러 왜곡시키려는 조작적인 보도 때문에 아주 딴 모습으로 일반에게 와전되고 말았다. 나의 말을 교묘하게 왜곡시켜 내가 중공군은 어떤 경우에도 한국전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라는 식의 형태로 바꿔서 보도됐던 것이다.
이는 완전히 곡해에 지나지 않는다. 회담은 전후해서 불과 1시간30분만에 끝나고 나는 대통령을 전송하기 위해 같은 차로 비행장으로 향했다. 차안에서 극동문제는 이미 화제에도 오르지 않았고 트루먼 대통령은 주로 국내정치 문제를 이야기했다. 나는 약간 지나친 질문이었지만 그에게 52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동경에서는 트루먼의 재출마여부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물어 보았던 것이다. 대통령은 내 질문에는 가부의 언질을 주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그런 정치적 야심이 있는지를 알려고 했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내 생각이 뚜렷하기에 『조금도 없습니다. 귀하에 대항하여 출마하려는 장군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이젠하워이지 맥아더는 아닐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껄껄 웃으며 『개인적으로 아이크를 좋아하지만』하고 전제하고 나서 『하지만 그는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백지이지. 아이크가 대통령이 된다면 율리시즈·S·그랜트(주=미18대 대통령·남북 전쟁 때의 북군 사령관·내정실패로 많은 비난을 받았었다)도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는 말을 들을 것』하고 비꼬았다. 트루먼은 계속해서 아이크에 대해 독설을 퍼부으려고 하기에 나는 황급히 좀더 온건한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워싱턴에 미묘한 움직임>
웨이크도 회담을 통하여 나는 워싱턴 안에 미묘하고도 우려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2차 대전 중의 프랭클린·루스벨트와 같이 기백 있는 지도자는 이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고 그 대신 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하는 것보다는 임시적인 미봉책으로 적당히 그 자리를 모면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 정면으로 맞부딪쳐 이를 쳐부순 자는 트루먼 대통령의 당초 단호한 결의는 쉴새 없이 되풀이되는 망설임의 속삭임과 냉소적인 태도에 에워싸여서 차츰차츰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대통령은 유엔의 일부 정치가들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쏟아놓는 달콤한 입치레에 쉽게 움직이고 있는 듯 했다. 자기 스스로가 단호하게 위험을 무릅쓸 결의를 보이고 나서 불과 2, 3개월 후에는 자꾸 뒷걸음질치는 태도를 보이려고 했다. 이는 야전군 사령관으로의 내 입장을 몹시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국에서 어떤 시대에도 온갖 수단을 다 써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보다 한국전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은 한 전쟁에 미국의 병사를 투입하고 그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그 전쟁의 중요성을 일부러 과소평가 하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웨이크도 회담이 무슨 목적으로 열렸는지는 잘 모르나 주로 내정 적인 포석이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중간 선거가 회담 2주일 후로 박두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은 이 회담을 개최함으로써 자기의 당(민주당)을 인천 작전의 성공에다 결부시킬 생각이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유를 붙이는 것은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서 공정치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그와 같은 동기로 웨이크 도까지 먼길을 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으며 회담의 유일한 목적은 서로의 좋은 감정을 키워서 미국을 위해 유익한 결과를 낳으려는데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나의 이와 같은 희망은 보답되지 않았고 역선전과 편견이 어떻게 손을 될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한편 맥아더 측근 코트니·휘트니 소장은 그의 저서 『원수의 역사와의 해후』(MacArthur : His Rendezvous With History)에서 웨이크도 회담은 워싱턴이 마련한 정치적 술수였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선거 노린 정치회담" 주장도>

<원수는 웨이크도 회담의 목적을 몰랐지만 나중에 가서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 틀림없이 웨이크 도에서의 워싱턴 전략은 처음부터 원수를 정치의 술수로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2주일 후의 중간 선거에 대비하여 트루먼 대통령과 민주당은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원수의 영광을 가로채려고 했다. 트루먼이 맥아더가 중공개입 가능성에 대해 자기를 오도했다고 비난한 것은 교활한 정치적 술책에 불과했다.>
결국 웨이크도 회담은 둘이 불화를 조금도 해소하지 못한 채 끝났고 오히려 나중에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자료로 이용됐을 뿐이었다. 이 회담이 개최된 10월15일은 한국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올 정도로 모든 정세가 유리했는데도 워싱턴과 동경의 보조는 맞지 않았다. 하물며 이로부터 바로 10일 뒤인 10월25일의 중공군 개입 후부터는 서로 책임전가를 꾀하면서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중요일지(1951년3월24·25·26일)
※3월24일
▲국군정찰대, 동해안에서 38선 돌파했다가 귀환 ▲맥 원수, 14번째로 한국전선 시찰 ▲이 대통령, 한만 국경까지 진격까지 진격해야 한다는 담화발표.
※3월25일
▲국군정찰대, 계속월경 ▲미 정부 대변인, 중공 폭격의사 없다고 언명.
※3월26일
▲이 대통령, 38선 돌파 준비완료 담화 ▲미 국방성, 맥 원수에 정치발언 중지시키겠다고 발표.

<알림>거창사건의 관계자료나 사진을 갖고 있는 분은 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 담당자 앞으로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화(94)3415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