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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태리문학의 정수|「그라치아·델렛다」여사 탄생 백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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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로마 정신규 특파원】금년은 l926년「노벨」문학상을 받은「이탈리아」출신여류작가 「그라치아·델렛다」(Grazia Deledda)의 출생 1백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여 「미네르바」「몬다도리」등 출판사들은 그의 단편·장편선집을 내놓았다. 이밖에 「이탈리아」의 전「매스컴」과 각지방에서는 이 세계적인 작가의 출생 1백주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1871년9월27일 지중해의 외딴섬「사르메냐」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라치아·델렛다」는 국민학교를 중퇴한 후 가사를 도우면서 교회참사회원이었던 숙부가 유산으로 남긴 서적을 읽기 시작하여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작품을 발표한 것은 16세 때 주간 여성지「울티마·모도」에 발표한 단편 『「몬테두로」의 공작부인』이었는데 당시 그 잡지의 편집장이었던「프로발리오」여사의 인정을 받아 그녀의 주선으로 초기 단편들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사르데냐」는 여성이 사회일선에 나서는 것을 이단시할 정도로 완고하고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델렛다」는 가족들과 동향사람들의 시선을 등지면서 까지 습작에 힘을 쏟아야했다. 그 무렵 그는 아름답지만 가난이 심각한「사르데냐」를 다루면서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역설하는 글을 계속 내놓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국내평론가들로부터는 호평을 받지 못하고 국외에서 보다 높은 인기를 얻어 그의 소설들은 독일「스웨덴」 일본 등지에서 번역 소개된 후에야 국내에서 출판되는 기이한 작품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델렛다」자신도 당시「이탈리아」문학계가 시기와 비방으로 지새고 있는데 환멸을 느껴 문단에 얼굴을 내놓지 않고 가정에 파묻혀 작품 쓰는데만 열중할 따름이었다.
『재』(1903년) 『갈대는 바람결에』(1913년)등 걸작을 발표한 후 42세가 되던 해인 1913년 「델렛다」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후보로 추천되었으며 16년, 18년 계속 후보로 추천되었다가 26년에 이르러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수상소식이 전해지자 「델렛다」는 남편 「마데사니」와 포도주 한잔으로 축배를 들고는 일체의 축하행사 초청을 거부했다. 당시「이탈리아」수상이던 「베니토·뭇솔라니」가 『당신의 영광을 세계가 우러러보는 이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는 축전을 보내고 「국가훈장」수여식에 초청했을 때에야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수상관저에서 독재자와 만났다.
수상과의 대면시간은 짧았다. 『도움이 필요하냐』는 「뭇솔리니」의 물음에 「델렛다」 는 『감사합니다만 없습니다. 다만 내가 태어난 집의 주인이 감옥에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정직한 사람입니다』고 말하여 집주인은 곧 석방되었다는 뒷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36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델렛다」는 장편36편, 단편2백50여편을 남겼다.
평론가들은 「델렛다」의 문학이 20세기초 「이탈리아」문학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20세기초 「이탈리아」 철학사상에서 나타나는 실증주의는 문학 면에서는 자연주의로부터 벗어나 사실주의의 대두를 보게 되는데「델렛다」문학에서 그 사실주의의 흐름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선과·악의 투쟁」은 「델렛다」작품세계의 주된 흐름으로 대표작중의 하나인『어머니』(1920년) 에서 볼 수 있듯이 『성직자인 사랑하는 아들의 방탕을 염려하면서 참된 삶으로의 귀의를 기도하는 어머니의 참모습』은 곧『반항하는 양심은 죄의 달고 쓴 연약성에 합일하나 결코 악의전체에는 미치지 못하며 심저의 내면세계는 항상 법을 어긴 비밀을 간직, 고민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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