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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세상읽기

미·중 두 태양 중 누굴 선택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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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강일구]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지난달 중순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이 울산에서 연 한·중 세미나엔 중국에서 40세 이하 소장파 학자들이 초청됐다. 그중 한 중국 학자의 발언에 귀가 번쩍 뜨였다. 한국에 올 때 아내도 함께 왔는데 아내는 ‘파마하러 왔다’는 것이다. 관광과 쇼핑, 성형을 넘어 이젠 동네 미장원 가듯이 중국인이 한국에 오는 시대가 됐다. 얼마 전 시청 앞 작은 분식점에서 한국을 ‘느껴보고자(感受)’ 홀로 배낭여행을 왔다는 중국 청년과 마주친 게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하철 강남역 근처에선 붕대로 얼굴을 싸맨 중국 여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우리야 회복될 때까지 두문불출하지만 중국 여성들은 그 귀한 시간 동안 쇼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길거리에서 중국어를 들을 기회가 많아졌다. 어릴 적엔 화교(華僑)가 운영하는 중국집에나 가야 들을 수 있던 중국말을 이젠 8만 중국 유학생이 진출해 있는 우리 대학 캠퍼스는 물론 식당과 전철 등 곳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중국인만 중국어를 쓰는 게 아니다. 지난 9월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이 주재한 차이우(蔡武) 중국 문화부장과의 오찬 모임에 참석했다가 내심 놀랐다. 이 회장은 중국어는 물론 중국어 노래까지 하는 실력파다. 한데 이날 자리를 같이한 정몽준 의원까지 유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박또박 중국어로 인사말을 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 중국어를 공부했나 싶었다.

 그뿐이 아니다. ‘중국문제 특성화’ 대학을 표방한 원광대학교는 지난달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중관계연구원’ 개원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정세현 원광대 총장 역시 정확한 중국어로 인사말 서두를 장식해 참석자들의 감탄을 샀다. 지난 9월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한중공공외교포럼’ 때는 본지 홍콩특파원 경력의 박병석 국회부의장이 빼어난 중국어 실력으로 한국어 반, 중국어 반 축사를 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6월 방중 때 중국어 연설을 한 이후 우리 지도층 인사들의 중국어 구사가 부쩍 느는 추세다. 중국어 열기만 뜨거운 건 아니다. 올가을 서점가의 베스트 셀러는 조정래의 『정글만리』다.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변신 중인 중국에서 뛰는 비즈니스맨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중국에 대한 궁금증을 작가 나름대로 해석한 게 특징이다. 7월 중순 초판을 찍은 이 책은 지난주까지 80만 부가 팔렸다.

 한국에 ‘제2의 중국 붐’이 이는 듯하다. 배경은 무언가. 파마하러 한국에 올 정도로 지갑이 두둑해진 중국의 부(富)가 정답일 듯싶다.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무릇 세인은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10배 부유하면 헐뜯고, 100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1000배가 되면 그의 일을 해주고, 1만 배가 되면 그의 머슴 노릇을 한다. 이것이 사물의 이치다(凡編戶之民 富相什則卑下之 伯則畏憚之 千則役 萬則僕 物之理也).’

 2000여 년 전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미국 출판계는 위안(元)화를 벌기 위해 자존심을 접고 작품에 대한 중국 당국의 가위질을 허용했다. 영국은 중국 자본 유치를 위해 에너지 사업 등 국가 안보에 직결되는 시장의 빗장까지 풀고 있다. 중국 관영 CCTV가 제품의 서비스와 하자를 지적하자 애플과 삼성전자는 곧바로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혹여 중국의 심사를 거스를까 세상이 노심초사하는 모양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양(量)의 변화가 질(質)의 변화를 초래하듯 중국의 요구는 많아지고 강도 또한 세질 것이다. 얼마 전 필리핀과 갈등관계에 있는 중국이 한국에 필리핀으로의 경공격기 수출을 자제했으면 한다는 의사를 비친 게 좋은 예다. 이번엔 별문제 없이 넘어갔지만 향후 중국의 굴기와 더불어 유사한 요구가 늘 수 있다. 특히 경제는 중국에,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은 미·중이 충돌하는 사안마다 선택을 강요받을 가능성이 크다.

 장제스(蔣介石)는 과거 공산당 토벌에 나서며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의 하늘엔 두 개의 태양이 있어 선택이 가능하다”고 응수했다. 동아시아 하늘에 이제 미국이란 태양 외에 중국이란 태양이 뜨고 있다.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혹자는 선택이 필요 없는 문제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식의 순진한 생각이다.

 5년 전 중국이 한·미 동맹은 구(舊)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했을 때 선택에 대한 압박은 이미 시작된 셈이다. 이제 우리가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 답을 마련할 때다. 그 시작으로 우선 우리의 핵심이익을 국민적 합의하에 도출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주권 수호, 영토 보전, 통일 실현, 체제 유지, 경제 발전 등 다양하고 중요한 국가 이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무엇이 우리의 핵심이익이고 그 가운데에서도 우선순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택을 강요받는 매 경우마다 어떤 결정이 우리의 핵심이익, 그 가운데서도 가장 우선 순위의 핵심이익을 지키는 데 최선인가를 생각해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총명한 자는 시대에 맞춰 변화한다(明者因時而變)’는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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