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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되는 비장의 간송 미술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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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 나라 최대의 고 미술품 수장가인 고 윤송 전형필씨의 수집품이 「겸재 산수화전」(23일까지 서울 성북구 97 성북 국민학교 뒤 윤송미술관)을 계기로 세상에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윤송이 세상을 떠난지 10년만에 비장의 문을 열기 시작한 이 개인미술관은 아직도 전체규모가 미지수. 적어도 10년간에 걸쳐 정리, 년 2회씩 공개전을 가질 계획이다.

<겸재 산수화전 계기로>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산수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만도 1백여점을 수장하고 있는데, 이번 40여점만 간추려 전시한 것이다. 윤송미술관의 소장서화는 총 4천점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그중 3천여점에 대한 목록집이 수년 전에 간행된 바 있다. 어쨌든 서화 4천점이라면 국립박물관의 그것과 맞먹는 점수이다.
『한국의 회화사를 쓰려면 윤송「컬렉션」의 공개를 기다려야만 될 것』이라는 말은 우리 고미술에 뜻을 둔 외국학자의 말이다.
그만큼 양으로나 질면에나 이 「컬렉션」이 차지하는 비중은 높이 평가돼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 미술품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국보 및 지물로 18점(도자기 10, 불상 4, 회화 1, 전적 3)이 이미 지정돼 있고 또 국내외. 전시회에 여러번 출품됐지만, 그것은 극히 한정된 것에 불과했다.

<전회필씨 생전의 정성, 고 미술계 큰 기대>윤송의 생전에는 소수의학자들에게만 열람의 기회가 주어졌었다. 그는 고 미술품 수집에 있어 일일이 관계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 모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 「컬렉션」은 민족미술의 집성과 보전할 박물관을 뚜렷이 의식하면서 선택했고 또 모든 부문을 망라한 까닭에 다채롭고 알차기로 어느 「컬렉션」도 따를 수가 없는 내용이다.
그는 일제침략하의 어려운 고비 속에서도 민족문화의 숨통을 트기 위해 민족의 재산으로서의 문화재를 모으기에 일생을 바쳤다. 때로는 일본에까지 건너가 우리의 국보급문화재를 국제적 경쟁 속에서 고가로 환수해 놓기도 했다.
그는 고미술품 수집만이 아니라 고고미술 동인회를 발족시켜 뒷받침해주었고 문화재위원으로 활약하는 등 공헌이 크기 때문에 64년에 문화대장 국민장을 받았다.
그러나 1962년 그가 56세로 별세하자 윤송 미술관의 30여년에 걸친 수집은 멈춰 버렸고, 미술관은 장기휴관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그의 두 아들이 학업을 마치고 이들 미술품의 경리사업을 착수,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윤송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비교적 정리 된 부문이 서화. 그 다음이 수천점의 전적이고, 도자기와 금속공예품 및 민예품 등은 수천점으로 어림짐작할 뿐인 채 창고속에 묻혀있다.
학문적인 발굴이 거의 무진장한 윤송「컬렉션」이지만 국가에서도 그 정리를 지원해 주지 못하는 터이어서 전모의 파악은 훨씬 늦어질 것으로 내다보인다.<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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