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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11월을 어루만지는 선율들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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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호 27면

독일 출신의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1885~1973). 만년에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수많은 명연주를 남겼다. [사진 EMI]

또다시 브람스다. 11월이니까. 어떤 11월도 브람스를 동반하지 않으면 끝끝내 11월에 도달하지 못한다. 11월은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할 계절이다. 굳이 누군가를 만나야겠다면 버스를 타고 이미 떠나가 버린 사람을 떠올릴 일이다. 떠나가는 그녀는 차창 꽁무니에 캄캄한 매연을 가득 남겼고 나는 숨이 막혀 간신히 그 이름을 부른다. 브람스….

[詩人의 음악 읽기] 브람스 3번 교향곡

그녀와 몇 월에 헤어졌는지 기억할 수 없다. 결별의 과정만 5년, 너무 긴 시간이었다.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어떤 장소였는지 모두가 부연 막이 덮여 있고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하늘이 샛노랗게 질려 있었다. 이 결별 뒤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녀가 먼저일까 혹은 내가. 어떤 죽음도 그 시절엔 달콤했다. 하늘에서 ‘끝’이라고 알려주는 종소리가 땡 하고 쳐주기를 바랐다. 그런 일이 없는 대신 죽음을 소망했고, 달콤한 죽음에 꼭 맞는 장갑처럼 어울리는 계절이 11월이었다. 계절의 사운드, 이별의 사운드트랙이 정처 없이 통속적으로 흐른다. 브람스다.

11월을 채우는 브람스는 네 곡의 교향곡이다. 곡마다 자기 나름의 브람스를 주장하지만 연주는 특별히 한 인물을 지정해야겠다. 필하모니아를 지휘한 오토 클렘페러. 매우 천천히 미끄러져 나가는 클렘페러의 사운드를 두고 ‘소리가 울창하다’ 하는 표현이 떠오른다. 그는 어떤 잔 기교도 속도의 변이도 없이 오직 공간을 꽉 채우는 음향만으로 우리를 압도하고 이끈다. 쓸쓸한 감성의 대명사처럼 4번 교향곡이 늘 거론되지만 요즘 까닭 없이 3번에 손이 더 간다.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영화화될 때 3번 3악장이 쓰여 친숙하다. 제인 버킨의 노래로도 익숙하고. 그러나 3번 교향곡 속에 조금 덜 알려진 사연도 함께 기억해 본다.

클렘페러와 필하모니아의 브람스 3번 교향곡.

약혼 경험도 있고 몇 차례 연애 사건도 있었고 무엇보다 슈만의 아내 클라라와의 연정으로 기억되는 브람스지만 끝내 결혼은 하지 않았다. 독신자의 친구 관계는 어땠을까. 음악사가들이 공통적으로 설명하는 브람스의 캐릭터로 ‘지나치게 긴밀한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자기 내면에 꼬치꼬치 파고 들어오는 친한 친구 관계들에 공포를 느끼고 소름 끼쳐 했다는 브람스였다. 그 바람에 벌어진 일이 일생의 지기이자 후원자 격인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과의 파국이었다. 요아힘이 없었으면 슈만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악보 출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없었으면 생산적인 음악 토론이 없어 작곡 방향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가장 친하고 가장 소중한 브람스의 벗이 요아힘이었다. 하지만 의처증 증세가 있는 요아힘이 아내와 이혼소송을 벌일 때 아내 쪽이 승소하는 데 결정적 증거물이 된 것이 브람스가 남긴 편지였다. 친구 요아힘의 성격에 대해 냉정하고 부정적인 진단을 내린 브람스의 편지 한 통. 그 일로 30년 우정이 원수처럼 끝장났다. 많은 세월이 흘러 죽음이 멀지 않은 브람스가 재회의 메시지로 보낸 것이 바로 3번 교향곡의 초고였다. 요아힘은 친구였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브람스를 다시 받아들인 진짜 친구였다.

그러니까 브람스의 3번 교향곡은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없는 시절에 쓰여진 셈이다. 11월의 사람들은 너무 밀접한 관계의 끔찍함을 알고 있다. 고독보다 더 괴로운 것이 관계의 구속감이다. 저녁의 술집에서 왁자하게 단체로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입이 하도 울창하여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 가깝고 다정하고 신상을 소상히 알고 있는 관계가 있다 해서 대체 섬처럼 표류하는 존재의 격절감이 어떻게 위로받을까. 더욱이 계절은 11월인데 사람의 말로 함께 나눌 수 있는 말이 가능할까.

사랑은 경험될 수 없다. 오직 기억할 수 있을 뿐. 버스를 타고 그녀가 떠나가 버리기 전까지 그것이 사랑인 줄 알 수가 없었다. 마주치는 관계여야 사랑이라는데 나는 눈 감고 달려들기만 했었다. 버스가 떠나가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른 사람을 만났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상대방을 쳐다보려 하지 않게 되었다. 남녀관계의 메커니즘에 염증이 나버린 탓이리라. 그래도 연애를 하고 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만든다. 친구들은 계속해서 저녁의 술집에서 건배를 하고 단체로 ‘와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그렇게 지상에서는 아무런 일도 없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젠장 시러베아들 같은 11월이라니!

어쩔 수 없이 11월이라면 브람스도 어쩔 수 없다. 차곡차곡 네 곡의 교향곡을 재생시키며 오토 클렘페러의 넉넉한 품에 기대는 것이다. 친구도 아내도 없었던 브람스에게 자기 자신이라고 충분했을까. 아무도 없어야 마땅할 11월을 위해 살뤼(Salut)! 저 울창한 교향곡의 사운드, 저 울창하게 단체로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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