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28)노병의 낙조|유엔군의 총퇴각(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950년11월24일, 「유엔」군의 종전 공세 전개를 직접 보려고 동경에서 평양으로 날아온 「더글러스·맥아더」원수는 자신만만한 성명과 함께 「크리스머스」까지 병사들은 집으로 몰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동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수를 신의주상공으로 들러 압록강에 따라 비행시기며 만주를 뜻깊은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10월25일부터의 중공군과의 여전으로 「유엔」군의 진격이 둔화되었지만 이제 이 종전공세로 한달 안에 한국 전쟁은 끝낼 수 있다고 「맥아더」는 판단한 게 틀림없었다.

<중공군의 무한한 힘 인정>
그러나 불과 2일만에 이것은 엄청난 오산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맥아더」는 종전 공세 개시 5일만인 11월28일에 『이미 한국사태는 자기 사령부 힘으로써는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다음과 같은 불안과 고민에 찬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또한 자기 강변이라는 비난도 면치 못했다.
『「유엔」군이 북괴군을 섬멸하고 10월 하순에 압록강에 다다랐을 때 중공군은 일시적으로 아군과의 접촉을 끊고 장차 기습 공격을 전개하려고 압도적인 병력을 축적했다. 중공군의 궁극적 목적이 한국 안의 「유엔」군을 단번에 전멸시킬 결정적인 손을 쓰는데 있다는 것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계획은 「유엔」군이 「종전공세」를 개시하여 적과 예정보다도 앞서 교전했기 때문에 탄로되고 말았다. 중공군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 갖는 이점을 지니고 있으나 이에 대항하는 우리병력은 충분치 않다.
그 결과로 현재 새로운 정세가 빚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이 사태에서 발생될 문제는, 현지 사령관으로서 결정할 수 없는 세계적인 성격을 지니게될 것이 예상된다. 이제부터의 문제는 「유엔」의 여러 기구와 세계의 여러 나라 정부가 해결해야 한다. 당 사령부는 가능한 노력을 다했지만 당면한 정제는 이미 당 사령부만의 힘으로써는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제 중공 전체가 지닌 무한한 힘에다 소련의 보급면의 원조까지 곁들인 적과 대항하고 있다. 이에 대처하는 나의 전략은 공세에서 수세로 옮기며 유동하는 전황에 따라 적당히 국지적인 수를 쓰는 것이다.』

<중공군 60만 은밀한 집결>
10월25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전개한 1차 공세에서 시간 여유를 얻은 중공군은 50∼60만의 대군을 은밀히 집결하면서 다음과 같은 작전계획을 세웠다.
(A) 제4야전군의 제13 「군」(18개 사단)은 청천 강 유역에서 한 미군을 격파하고 평북을 탈환한 후 38선을 향해 추격전을 전개한다. 공세 개시 일자는 11월내25일로 정하고 공세와 추격전에서 북괴군과 긴밀히 협동한다.
(B) 제4야전군의 제9 「군」(12개 사단)은 우선 주력으로 장진호에서 미 제1해병사단을 섬멸한 후, 함흥지역으로 진출하여 미제 10군단에 하부대를 격파한다.
이 동안에 일부를 원산지구에 전진시켜 북괴군과 함께 이를 공격한다.
미 해병대에 대해서는 포위와 퇴로 차단을 반복하여 이를 섬멸한다. 이 방면의 공세 전개일자는 11월 26일로 정한다.
(C) 공세기도를 철저히 은닉 하기위해 「D데이」전까지는 일체 적과 접촉해서는 안된다.
(D) 북괴군 전선부대는 공세 전까지는 적과 중공군과의 접촉을 차단할 임무를 띤다.

<8군 우익의 한국군 분산>
이런 계획으로 서부에서는 제13 「군」의 약40만 병력이 대체로 태천∼운산∼희천 일대에 배치되어 평양 공격을 준비하고 동북부에서는 재9 「군」의 12개 사단이 미 해병대1개 사단을 섬멸할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이렇게 해서 10월 하순에와 마찬가지로 11월 하순에도 청천강 유역과 장진호에서는 일대 결전이 전개될 참이었다. 물론 중공군으로서는 예기한 조우전이지만 「유엔」군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함정」이었다.
「유엔」군의 종전 공세가 24일에, 그리고 중공군의 공세는 25일에 각각 전개됐으니까 피아의 공세가 서로 격돌한 셈인데 이미 27일에 「유엔」군 전선의 붕괴 징조는 나타났다. 26일과 27일에 미 재1군단은 아직도 공세를 지속했지만 운산 남측으로부터 구장의 선을 지키던 미9군단은 큰 피해를 보았고 8군 우익의 한국군 제2군단은 적의 돌파로 분산되었다. 중공군은 10월 하순의 제1차 공세 때에는 청천강까지 진출했다가 자취를 감추었지만 제2차 공세에서는 계속 밀고 내려왔다. 병력도 대군인데다가 전의도 만만치 않아 혹한을 무릅쓰고 전 전선에 걸쳐 밤낮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공격 요령은 우선 전선 양익이나 간격으로부터 침투하여 측면과 배후로부터 공격하고 동시에 정면에서도 강압을 가하는 것을 통례로 하였다. 또한 이와 함께 퇴로에서 매복 기습을 가하기도 했다. 정면 공격에서는 「인해전술」로 계속 돌격을 가하여 「유엔」군 진지 수비병들이 탄약을 다 소모한 후 밀려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인해전술은 인명손실을 전혀 도외시한 공격 수법으로 「유엔」군에 심리적 공포를 주어 어떤 부대는 싸우지도 못하고 패주했다.
이전법과 야습은 북한 산악지대에서 주로 차량에 의존해 싸우는 「유엔」군에는 극히 효과적이었다.
한편 11월28일에 전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은 「월튼·워커」8군 사령관은 우선 청천강 유역까지에의 후퇴를 결심하고 예하 부대에 다음과 같은 작명을 전달했다.

<청천강 유역까지 후퇴키로>
(A)중공은 제4야전군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것 같다.
한국군 제2군단은 26일 저녁이후 단위 전투부대로서의 전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적은 아군우익에 살도 하고 있으며 상황은 예측을 불허하다.
(B)미8군은 청천강유역까지 후퇴하여 차후 행동을 준비한다. 공세지속의 생각은 버리지 않았지만 상황변화에 따라 후퇴를 계속하는 것이 득책일 경우도 있을 것이다.
(C)미제1군단은 속히 신안주 부근에 후퇴하여 차후의 공세나 또는 사태가 긴박한 정면에로의 전진을 준비한다.
(D)미제9군단은 8군의 우상을 엄호하여 안주∼군 우리선에 후퇴하여 차후의 공세를 준비한다.
(E)미제1기병사단과 영국군제27여단은 신속히 순천∼북창리선을 확보하고 8군의 우측 배면을 엄호한다.
(F)한국군 제2군단은 속히 병력을 수용하여 성천∼양덕 북측의 선을 확보한다. 한국군제5사단을 2군단 예하에 배속한다.
(G) 한국군 제3군단은 별도 작명에 따라 배상, 전선에 배치된다.
사태의 역전을 감지한 「맥아더」원수도 11월28일에 「워커」8군 사령관과 「아먼드」제10군단장을 한국으로부터 동경으로 불러다 전세를 분석 검토하고 증대 결정을 내렸다.
종전공세를 포기하고 후반 한다는 결정이었다. 28일의 동경회담소집과 결정에 관해서는 종래의 원수답지 않은 몇 가지 약점을 드러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첫째는 「유엔」군 전선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으며 일부는 이미 붕괴해서 분초도 사령부를 떠나서는 안될 현지 군 사령관과 군단장을 몇 시간 동안이기는 하지만 동경에 조치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한국전쟁 중 어떤 중대한 결점은 원수가 반드시 현지에 비행해서 직접 보고 느끼고서 내렸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괴남침 초에∼미 지상군의 투입을 결심한 것은 한강 둑에서였고, 낙동강 교두보의 확보는 대구에서 결정한 것이고, 인천상륙은 「매킨리」호 함상에서 몸소 지휘했던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38선 돌파 북진을 결의한 것은 9월29일의 서울 환도식 때였고, 11월24일의 종전공세의 발기도 스스로 평북에 비래해서 확인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때까지 「맥아더」는 어떤 중대 결정을 취하거나 사태가 벌어질 때에는 꼭 현지에 직접 가서 확인하곤 했던 것이다.

<평북·원산선 확보를 낙관>
그렇던 그가 「유엔」군이 붕괴 위기에 직면한 이때에 동경후방에 부하 지휘관을 불러다. 후퇴 결정을 내린 것이다. 형광에 빛나는 상승의 노병이 이런 일을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로부터 5개월 후 노병은 부대에서 사라지니까.
「워커」「아먼드」의 두 현지 지휘관과 4시간동안 사태를 숙의한 「맥아더」원수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중공 제4야전군의 5개 「탁」이 미제8군에, 그리고 제3야전군의 2∼3개 「군」이 미 해병대를 공격하고 있다. 중공은 이제 정규군의 정예부대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참전하고 있다. 「유엔」군은 평양∼원산선으로 후퇴하여 전세를 안정시킨 후 차기행동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맥아더」는 평양과 원산선은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한 중공군의 개입 병력도 실제보다 반수인 2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파국은 예상보다도 더 심각하게, 그리고 더 급속히 다가오고 있었다.
◆주요일지(1951년1월8·9·10일)
※1월8일=▲원주포기 ▲아군, 인천주변에 함포 사격 ▲이대통령, 국민에 궐기 호소
※1월9일=「유엔」군, 원주지구에서 소규모의 반격전 ▲「트루먼」, 국회에 연두교서, 자유세계 단정하여 소 침략에 대비 호소 ▲영연방회의, 대일 강화조약 조속 체결합의.
※1월10일 ▲미2사단경찰대, 원주 돌입 후 철수 ▲오산지구에서 적대병력남하
※알림=6·25때 부산서 입대, 피일 훈련후 미7사단에 배속되어 북진에 참가한 정성인씨(황해도 은율군 출신)의 소식을 아는 전우는 중앙일보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로 연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연락처(28)8211(교환)의74번, 야간과 일요일은(94)3415로(연신 연락도 좋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