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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제 17화>양서초기(12)이종우<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걸물 김종태>
한국인이 선전 심사의원 즉「심사참여」가 되기는 1937년 제 16회전부터이다. 「무감사」작가 중에서 선발하는데 동양화가 이당 김은호·청전 이상범 두 화백과 서양화가로 유일한 김종태씨 등 모두 세 사람이었다.
경성사범학구 출신인 김종태씨는 22세쯤에 선전에 출품하기 시작, 금새 화단을 주름 잡은 사람이다. 말쑥한 얼굴에는 재기가 넘치고 또 예리한 감각으로 다작했으며, 하도 붙임성이 좋아 일본의 우수한 화가·문필가와도 왕래하는 터였다.
그는 작품으로만 촉망받는 것이 아니고 처세에 있어서도 추종을 불허할 만큼 앙똥하고 패기 만만한 데가 있는 소장화가였다. 본시 김포 태생인데 사범학교를 나와 서울주교보통학교 교원을 했다. 마침 동경에서 그림공부하고 돌아온 행인 이승만씨를 쫓아다니며 그의 그림을 보고「힌트」를 얻어 그린 것이『어린이』.「언더샤쓰」바람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소년을 소재로 한 이 유화는 생전처음 제6회 선전(1927년)에 응모하여 일약 특선까지 한 작품이다. 이전의 것에 비하면 그때 비로소 그림에 대한 눈을 떴던 것 같으며 이후에 해마다 선전에 출품했다.
그가 특선작가가 되자 보통 학교에 없는 미술교사가 되었다. 그때 주교학교에는 역시 그림을 그리는 윤희순씨가 있었는데 창가에 조예가 있어 지장의 아량으로 그 무 사람은 각기 예능만 가르치게 했다. 그런데 금씨는 35원의 월급장이가 점심 외상값이 15원이나 되도록 헤펐다. 뿐더러 학생들이 가져오는 월사금을 다 써버리고 일인 여직원의 주머니마저 다 털어 쓰고- 그러면서도 여성들한테는 인기가 좋은- 시체말로 낮도깨비 같은 사람이다. 교장은 보다보다 못해 권고면직 시키는 대신 선전고문인「다까하시」(고교) 시학관에게 그를 소개했다. 그는「고바야시」의 집을 드나들며 그림 공부를 하며 용돈도 타다 썼다. 그가 1933년께 동경으로 그림 공부하러 가게된 것도 그에 연유된 것 갈다.
그는 오랜 기간 이승만씨의 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그림을 그렸다. 행인의 통동(지금의 통인동) 집은 1백간의 저택이요, 화실이 마루까지 15간이나 됐다. 그래서 전씨를 비롯해 윤희순·안석영씨 등이 자기화실처럼 이용했고 김중현·이창현·윤장렬·김복진씨 등도 한패로 출입했다. 그 중에도 김종태씨는 행인을 형처럼 따랐는데, 꼭「언니」라고 불러 눌림을 받았다.
그는 안보면 궁금하고 만나면 질색할 존재라 할까. 참 비위 좋은 사내요, 어떤 점에서는 얌체였었다. 총독「우가끼」의 사위이며 비서인 「야노」가 그림을 좋아하는 기미를 알자 그의 여행가방을 들어주면서까지『선생님』하고 쫓아다녔다. 그 턱에 그는 서울역 앞의 l등 호텔이던 조일 여관에서 기거하며 여관에서 용돈까지 빌어 쓰는가하면, 남산에 있던 송병준씨의 저택이며 장사동 일본절 같은 데를 화실로 얻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1936년 개성에서 전람회를 가진 일이 있다. 개성의 유력자이며 그 당시 중앙일보부 사장인 몽초 최선익씨의 주선이었다고 기억되는데, 거기서 이미 판 작품을 다시 빌어다가 딴데로 팔아버려 소문이 났었다. 그는 그런 돈으로「바」에서 너무 양주를 퍼마시어 봉변을 당하고도 조금도 시끗하지 않았다. 한푼 없이 인력거 타고 와서 친구에게 돈 달라기 일수요, 친구 부인의 반지를 빼어「모델」료를 지불키도 했다. 어떤 행동에든 뉘우침이 없고 그저 태연했다.
생활에는 이 같이 걸개인데 자만만은 대단했다. 당시 음악가로서 이종태란 사람이 있었는데, 『더러운 자식이 내 이름을 쏜다』고 개명을 요구하다 못해고 집까지 가서 문패를 떼 팽개치는 괴짜였다. 또 자기 일에는 추호도 소홀한데가 없으며 특히 제작면에나 화구 정돈 상태를 보면 빈틈없는 사람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37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어놓고는 장질부사로 갑자기 객사했다(32세?). 결혼도 않고 연인밖에 없었기 때문에 친지들이 장례를 치르고, 서울에서 유작전을 열었었다.
선전에서 활약한 그 밖의 양화가로는 김중현·황술조·이창현·강신호·이인성씨 등이 있다. 그중 강씨는 고향이 진주로 개인전 하러 갔다가 남강에서 익사했다. 그와 동급이던 황술조씨는 섬광이 빛나는 아주 격 높은 작가였는데 그만 게을러서 작품이 드물다. 코밑 수염을 기르고 언제나 웃는 얼굴인 그는 침착하고 온정 넘치는 인품이다. 취미도 다방면이어서 추사글씨를 좋아하고 불상을 수집하며 다도와 조원·목공예에 일가견이 있는가 하면 양요리 솜씨 또한 능란했다. 해방이 되기 전에 후두결핵으로 요절했다. 역시 애석한 사람의 하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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