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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남과 북의 포로수용소(13)|「도드」준장의 피랍(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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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유엔」군 사령관직을「마크·클라크」장군에 인계하던 중 도드 준장 피랍사건에 직면한 「매듀·B·리지웨이」대장은 이 사건을 자기 책임 하에 단호한 태도로 해결할 결심으로 한국에 비래했다. 리지웨이 대장은 전쟁에서는 장군도 사병과 똑같이 목숨을 걸어야하며 어떤 상관을 구출하기 위해 그 부하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부터 무력 사용을 포함한 강경한 방법으로 이 사건을 수습해야하며 공산 포로와의 흥정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리지웨이, 도드 희생 각오>
그러나 도드 사건은 진행중인 휴전 회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큼 이를 엄두에 두어야하는데다가 사태 수습책에 대해서도 현지 사령관인 밴플리트 대장과도 의견이 잘 맞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동경에 와 있는 자기 후임인「클라크」대장이 도맡을 사태 수습의 뒤치 닥 거리도 미리 계산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겪은 시련을 그의 저서「한국전쟁」(Korean War)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나는 밴플리트 장군이 도드 구출을 위해 공산 포로와 협상할 계획이라는 말을 듣고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번 사건에 취할 모든 조치가 휴전 협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떤 사태 수습의 명령을 내리기 전에 「유엔」군 수석 협상 대표인「c·터너·조이」제독과 협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만난 조이 제독은 우리가 사태 수습에 있어 어떤 미봉책을 쓴다면 공산 측은 굴복의 신호로 생각한다는데 나와 의견을 같이했다. 또한「조이」제독도 우리는 도드 준장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고 이 요구는 무력 사용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밴플리트 장군에게 탱크를 포함한 모든 필요한 무력을 써서 수용소 내 질서를 회복하라고 서면으로 명령했다. 밴플리트는 미 제3사단의 탱크 1개 대대를 곧 거제도로 급파하는 조치를 취했다. 만약 공산 포로들이 항거하거나 우리 요구 수락을 지연시킨다면 나는 정말 탱크를 수용소 안에 투입할 결심이었다. 그렇게 되면, 잡힌 도드 준장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도드, 감금된 채 중재 역할>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내 자신이 질 각오였다. 밴플리트 장군과 그 밖의 인사들이 친구의 목숨을 구하고 싶어하는 것을 십분 이해하지만 나는 모든 직업 군인과 마찬가지로 도드 준장도 이 직업을 택할 때 와석 종신 못 할 경우를 각오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많은 미군 장병들이 포로 송환문제에 있어 우리가 원칙을 고수하는 동안 전쟁터에서 생명을 바쳤다. 전시에 있어서는 장군도 사병과 마찬가지로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게 마련이다. 모두가 매일 이 나라의 안전과 자유와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어떤 장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만약 우리가 사병들이 기꺼이 목숨을 건 원리와 원칙을 포기한다면, 이들 사병을 배신한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드 준장의 죽음을 뜻할지도 모를 무력 사용을 명령한 것이다. 그런데 밴플리트 장군은 이와 같은 내 명령의 실천을 연기했다. 그 이유인 즉, 탱크의 거제도 도착이 늦었다는 것과 이밖에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인데 나로서는 후자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한편 수용소 안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도드 장군은 미군 수용소 당국이 포로들을 살해 학대하고 있다는 장문의 비난 문서를 포로들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그들 주장에 의하면 그런 비난의 어떤 점은 수용소 당국에 책임이 있다는 자인을 도드로 부 터 받았다는 것이다.
콜 슨 신임 소장은 5월10일 상오 10시까지 도드를 석방치 않으면 수용소 안으로 쳐들어가겠다고 통고했다. 미군 병력이 돌입 태세를 갖추자 공산 포로들은 새로운 일련의 요구 조건을 들고 나왔다. 그들의 요구란 유엔군에 참을 수 없는 굴욕을 주는 것으로 말하자면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 군이 저지른 것보다도 더 야만적인 범죄를 범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내용이었다.>

<포로들 4개 협상 조건제시>
다음부터는 내외 자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이 사건의 줄거리를 더듬어 보겠다.
소위「조선 인민군 및 중화 인민 의용군 포로 대표단」이라 서명한 그들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귀 사령부는 야만적 행위 모욕 고문 혈서에 의한 항의의 강요 위협 감금 대량 학살 기 총 소사 독「개스」와 세균 무기 및 원자탄 실험 등을 즉시 중지하고 국제법에 의해 포로들의 인권과 개인의 생명을 보장할 것.
②포로들의 불법적인 소위 자유 송환을 즉시 중지할 것.
③수천 명의 포로들을 불법적으로 재무장 또는 노예화하기 위한 강제 심사를 즉시 중지할 것.
④포로 대표단을 즉시 인정하고 이와 긴밀히 협조할 것.
본 대표단은 이상의 문제 해결을 위한 만족할만한 서면 회답을 받은 다음 도드 준장을 인도하겠다. 열의와 성의 있는 회답을 기다린다.』
이와 같은 요구는 5월10일 아침 콜 슨 준장에게 제출되었다. 이때의 상황을 도드 장군 자신은 그가 석방된 후 마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5월10일 아침에 포로들의 4개 항목의 요구 조건이 콜 슨 장군에게 제출되었다. 번역에 필요한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된 후 콜슨 장군은 즉시 서면 회답을 보냈다.
포로들은 10일 정오까지 그 회답을 검토한 후 나한테 와서 콜 슨 장군의 회답은 전혀 수 탁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콜 슨 준장은 사실상 그들 요구에 동의한 것이었으나, 영문의 한국어 번역이 서툴러 포로들이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미군의 첫 회답 거부하고>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콜 슨 장군의 회답을 수정한 후 이것이면 만족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만족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콜 슨 준장은 수정된 성명에 다시 서명하여 포로들에게 전달했는데 그들은 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세 번째로 성명을 각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콜 슨 준장이 도드를 석방시키기 위해 서명한 최종 성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귀하의 서신 제1항에 관하여 본인은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를 살상한 유혈 사건이 있었음을 시인한다.
본인은 국제법 원칙에 따라 장차 본 수용소 포로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할 것을 약속한다. 본인은 장차 폭행 및 유혈 사건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앞으로 이런 사건이 발생할 경우에는 본인이 책임을 지겠다.
②제2항의 요구 조건에 관하여 자유 송환 문제는 판문점에서 토의되고 있다.
본인은 판문점 회의에서의 결정을 좌우할 권한이 없다.
③제3항의 강제 심사에 관해서는 도드 준장이 무사히 석방되면, 본 수용소 포로들에 대한 강제 심사나 재무장, 또는 개인 심사는 없을 것을 확언한다.
④제4항의 도드 장군의 동의와 본인의 승인을 얻은 세칙에 의하여 포로들로 구성된 포로 대표단을 조직할 것을 승인한다.
본인은 귀하의 요청에 의하여 그리고 귀하가 이 회답을 접수하면 가급적 속히 (늦어도 10일 하오 8시까지) 도드 장군을 석방하리라는 양해하에 본인이 서명한 이 서면 회답을 도드 준장을 통해 귀하에 전달한다.』
이것은 포로들의 요구를 거의 수락한 굴욕적인 회답이었다. 도드는 10일 밤 9시30분에 석방됐다. 그러나 공산 포로들은 도드를 석방하기 전에 다시 한번 이 사건으로부터 좋은 선전 자료를 얻으려고 했다. 이때 일을 도드 자신은 이렇게 말하였다.
『콜 슨 준장의 회답을 받고 나의 석방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기가 좋지 않아 내일 아침에 내보내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나의 소위 석방 식 준비를 위해 콜 슨 장군에게 또 새로운 서신을 작성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꽃으로 나를 장식하고 수용소 입구까지 늘어선 포로들의 대열 사이를 거쳐 나를 석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콜 슨 장군은 내가 인계될 출입구에 와서 나를 맞이하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같은 모든 계획은 취소하는 것이 좋으며 포로들이 즉시 석방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미군도 이상 더 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력 기피에 미묘한 여운>
이때 시간은 이미 하오 9시였다.
포로들은 곧 나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9시30분에 석방된다는 것을 콜 슨 준장에 알리라고 요청했다.
포로들은 또한 내가 평화적 분위기 속에서 석방될 수 있도록 군대를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를 토의하려고 했으나 나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포로들은 9시30분에 나를 수용소 문까지 데리고 와서 석방했다.』
도드가 피살되는 한이 있더라도 무려 사용으로 수용소 질서를 바로 잡으려던 리지웨이 장군의 결의와는 반대로 결국 현지 사령관들은 포로에 굴복한 셈이 됐다. 동경에서 돌아온 리지웨이 장군은 10일에도 밴플리트 장군에게 왜 8일자 자기 명령이 실행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리지웨이 장군은「나토」군 총사령관으로 전임되지만 5월12일 상오 8시에 공식으로 클라크 대장에게 지휘권을 인계할 때까지는 엄연히 한국전 최고 작전 책임자인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것이다. 탱크 도착의 지연이란 이유도 있겠지만 임기가 다 끝나 가는 군 최고 사령관의 작전 명령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겼다.
◆주요일지(1950년 12월18·20일) ※12월18일 ▲뉴질랜드 포병 대착 한 ▲중공 각지서 최초의 반영 데모▲나토 이사회, 군 총사령관에 아이크 추대 결의
※12월19일 ▲적, 개성 주변에 침투 ▲합동 수사본부, 10억 원 위 폐단 검거 발표 ▲미, 대 중공 우편 소포 제한 ▲트루먼, 공화당의 애치슨 장관 파면 요구 거부
※12월20일▲시공관서 언론인 궐기 대회 ▲이 대통령, 최후까지 수도 방어 강조▲맥 원수, 북괴군 15만 재편중이라 발표
※정정=본 연재 220회의 본문 기사 중 5월11일의 도드 석방 일자는 10일의 오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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