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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양화초기(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첫도화교실
유학까지 가서 서양화를 배워왔지만 졸업후의 직장은 고등보통학교 도화선생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양화에 대한 호기심은 크더라도 막상 사회가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또 그림을 팔고 사던 시절도 아니다. 다만 남이 못하는 서양그림을 배워왔다는 그나름의 긍지때문에 그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익혀주어야 겠다는 사명감만이 철저했을 뿐이다.
내가 미술학교를 마치고 귀국하자 춘곡은 중앙학교 자리를 쾌히 물러주었다.
그때 그는 장안의 유수한 사립학교인 중앙·휘문·진성등 고등보통학교 도화를 시간으로 맡고 있었는데, 나에게 중앙을 양보하면서 아주 보람있는 일을남겨주었다. 춘곡은 인촌 김성수씨에게 특청해 이 학교에 도화교실을 설치하도록 부탁했고, 즉시 지금의 서관2층 맨 북쪽의 가강큰 북향방이 상설제작실로 제공된 것이다.
이 도화교실은 우리나라 학교 중에서 맨 처음 마련된 수업의 특별활동 「아트리에」이다.이방에는 「이젤」과 석고상등이 항시 비치돼 있으므로 7,8명의 학생들이 하학후에 모여 어둡도록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함께 늙어가는 처지이지만 이마동씨는 휘문학교4학년생으로 참 열심히 나왔다. 중앙학교 학생으로는 김용준 길진섭 구본웅 김경등이 있었는데 모두 화단에 진출, 촉망되는 화가가 됐다. 개중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북쪽에 있어 소식이 끊긴 이도 적지않다. 그중 김용준은 5학년때 경복궁 동십자각을 총독부 청사(중앙청) 신축에따라 현위치로 옮겨짓는 공사광경을 그려 선전에 입선했다. 제목은 『건설이냐? 파괴냐?』. 이 깜찍한 소재의 그림은 뒤에 내가 인촌선생에게 갖다드리고 그의 동경유학 여비를 마련해 준일이있어 매우 인상이 깊다.
그밖에도 최창순은 배재학교 학생이어서 기억에 남아있다. 그는 매일 꼬박꼬박 서소문에서 계동 꼭대기까지 먼거리를 방과후에 오르내리며 석고「데상」을 했다. 그는 꼭 미술학교를 가는게 포부였는데, 가정이 넉넉찮은데다가 부모의 만류가 대단하여 그만「세브란스」의전에 진학하고 말았다. 그리고 의사가 되어 개성에서 적십자병원을 경영하더니, 해방후 미국에 떠나버린 것으로 알고있다.
이같이 중앙학교 도화교실은 장안에 하나밖에 없는 까닭에 여러 학교 학생들이 모여들기마련이었다. 그래서 이 도화교실은 양화초기에 있어서 소년들에게 양화에 대한 호기심을심어주고 화가지망의 싹을 가꾸는 요긴한 산실구실을했다.
중앙학교 도화교실에 이어, 학생들에게 그림지도를 해주던곳은 고려미술원이다. 1924년초에 을지로 1가 지금의우도「호텔」자리에 있었던 한옥을 빌어 문을 연 이 미술연구소에서는 동양화는 김은호씨, 서양화는 주로 내가 맡아 지도했는데, 구본웅 이마동 김용준등이 여기에도 나와 공부했다.
처음 고려미술원을 개설할때는 일반인 상대였는데도 역시 학생이나, 혹은 갓 졸업한 연소층이 많았고 대체로 호기심에서 드나들었던 것같다.
고려미술원은 당초 23년 가을 이땅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서양화가 「그룹」인 고려미술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서울에있던 강진구·김석영·김명화·정규기·구남순·이재순·박영래씨등 젊은 화가들이 중심이되고, 그밖에 몇사람의「아마추어」가 참가하고 있었다.
이「그룹」은 10월에 첫회원전을열고, 다시 연구소까지 개설하는 의욕을 보였다. 그리고 동양화·서양화의 지도 강사를 따로 초빙하고, 또 김복진씨로 하여금 조각을 지도하게했다.연구생의 수강료가 없음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강사료도 물론 지불하지 않았다.
나는 「프랑스」로 떠나기까지 1년 남짓「데상」지도를 했는데, 이동인들 가운데 화가로서 대성한 사람은 없지만 그때 그들이 보인 의욕은 여간 대단치 않았다.
그들 동인중 박형내씨는 사진을 하면서 서양화를 좀 했는데, 뒤에 보니 아예 사진업으로 전향했다. 본시 내관 출신으로 상해에서 유화를 배워온 강진구씨는 연구소 운영에「스폰서」역할을 한사람이다. 퍽 자유스러운「터치」로 풍경을 그린 김석영씨도 이「그룹」의중심「멤버」의 한사람인데 침자의로 개업하고는 미술과 인연을 끊었다.
그밖에 김팔봉씨의 아우인 조각가 김복진씨는 퍽 멋쟁이고 외교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고려미술윈은 내가 「프랑스」로, 뒤따라 이당이 일본으로 떠남에따라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더구나 동인들 자신이 작가생활을 멀리함에따라 연구소는 더오래 갈수 없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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