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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구약성서「솔로몬」의 아가에 보면『그대의 목덜미는 상아의 누각과 같다』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부터「상아탑」이란 말이 나왔다는 설이 있다.
원래 그것은 여자의「네클라인」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표현이었다. 그게 요새와 같은 뜻으로 바뀌어진 것은 19세기의「프랑스」비평가「상드·뵈브」이후부터 라고 사전에는 적혀있다.
아마 학자란 티없는 상아처럼, 그리고 마음씨 고운 소녀처럼, 탁한 세속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학자들도 상아탑 안에 만 갇혀 살수는 없게 된 세상이다. 사회가 대학교수들에게 여러 가지 형태의「참여」를 요구하는 때문도 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는 상아탑이 이들에게 안주의 세계가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은『학술연구활동을 위한 자유로운 분위기와 그 활동에 스스로 참여하고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조금도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제야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됐다는 데에 오히려 큰 뜻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로 하나의「한계점」에 이른 것이라고나 할까.
「헤파링」이 쓴『대학개혁의「다이내믹스」』(1969)를 보면 대학의 개혁이란 ①자원 ②개혁창도자 ③대학자체의 개방적 구조등 세 가지 기본조건이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헤파링」은 그러나 개혁주창자는 대학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아웃사이더」(외부인사)가 아니면, 대학과 사회의 접경에 있는「마지널·맨」(경계인)이라야 제대로 시대에 적응한 대학의 개혁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이란 원래가 폐쇄적이며 보수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개혁을 위한 이세개의 기본조건을 우리네 대학들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번 서울대 문리대교수들의 건의도 여전히 외로운 몸부림으로 끝날 것 만 같다.
도시「상아탑」이 고 귀와 권위의「이미지」를 연상시켜줬던 것은 상아가 곱기 때문에서만은 아니다. 「상드·뵈브」의 시대에는 상아는 몹시 값진 물건이었다. 따라서 아무나 손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새는 흔한 게 상아다. 요새 어린이들은 할아버지가 아끼던 상아 물 뿌리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상아 값이 이처럼 떨어졌으니 상아탑이 고귀할 까닭도 없다.
이게 세태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장가격이 떨어져도, 반드시 지켜줘야 할 가치는 따로 있다. 이게 바로 상아탑이다. 이것 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한나라와 인류사회에서 진정으로 귀한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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