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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가뭄 속 낭비언어들|이달의 시-고은<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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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시 비평이란 시를 발견하려는 고통을 언제나 전제한다. 불황의 시단이다. 거의 저질 시로 시단이 메워졌다. 그것은 우수한 시를 대조적으로 예상케 하는 일에만 목적이 있는 언어의 오물들이다. 천상병의 『근작초』(현대문학) 정현종의 『집 없는 세계』(월간중앙) 황동엄의 『허균4』(신동극) 이탄의 『흔들리며』(현대시학) 박제천의 『절창』(현대문학) 박주일의 『지금은 잠을 깰 때』(현대시학)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것들이 시로써 성공할 수 있는 독자적인 「딕션」을 확보하고 있다는 의미와 상관없이 불황의 원인규명을 예시하는데 이용될 위험을 가지게 한다.
고대 상형문자의 조립방식으로 본다면 시는 언십사라는 수식이 되며 그것은 시가 언어 사원이라는 경건성으로 설정된다. 현대시가 이런 시의 근본적 의미에 집작할 필요는 없다고 할 경우에도 그것은 시의원형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건성이란 시의 언어가 통속적인 언어수단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먼저 언어의 범위를 정신 자체에 귀속시킴으로써 언어가 시를 통해서 잉여물이 되는 것을 창조적으로 방위케 하는 일을 요구한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언어가 적거나 의식적으로 절제할 때 시의 가능성에 접근한다.
「프랑스」시가 이른바 숙고시 직접 시로 명료하게 분류되어서, 언어를 최소한도로 사용하는 절대경제에 의해서 숙고시의 「말라르메」 「발레리」가 남겨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시의 많은 부분은 아직 폐기하거나 망각하거나 해야할 언어에 거의 혼란상태로 도착하고 있으며 시인들의 언어낭비, 언어유희가시를 악화시키고 있다. 한국시의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사전에 수록된 형용사부사를 일단 거부하는 일을 요구한다. 왜 많은 시들이 낙서에 불과한가를 물을 때 이런 원인이 큰 이유가 된다.
천상병의 『근작초』는 그의 정신적인 낙백과 건강궤멸을 떠나서 본다면 찬사를 받을 수 없는 진술이다. 그가 죽음의 이웃에 자리잡고 있는 의식으로 기록한 진실이 충정의 대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을 때 한계가 확실해진다. 시가 시인을 개입시키지 않는 경우에 의해서 그의 정체가 나타난다. 그는 다름이 아니라 황량한 「멜러 드라머」로 감동시키고 있다. 그것은 시적 감동과는 분리된다. 『광화문에서』 『편지』들이 보여주는 육성은 시가 경악이 아니라 기악이라는 것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육성이 가지는 그의 쇠잔한 육감성만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그의 시에 깔린 「아웃사이더」적 고해와 기도는 산문적인 서술분위기에 잘 조화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비가는 좀더 내연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사상해 줄 수 있다.
황동규의 『허균4』는 언어에 대한 관념적인 미감을 강요함으로써 시가 유지하고 있는 직속적인 「이미지」를 중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의식하고있는 상황의 생동감이 보류된다. <우리 같이 보자 행인들 돌을 든 학생들…> 따위의 무중력상태는 그의 시가 이따금 보이는 의식불명의 전면으로 나타난다. 2연의 <꽃><꽃물> 3연의 <벽면>들 4연의 <손>들은 지나치게 선명하기를 바라는 재질이 가진 습관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극약이다.
정현종의 『집 없는 세계』는 박재삼의 시를 실패가 없다는 불행으로 비판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실패하고 있다. 좋은 시인의 실패는 그만큼 우울하다.
이보후퇴 일보전진과 같은 그의 문체가 집요하게 반추됨으로써 구문의 균열을 조장하고 있다. 시의 완미성은 감미하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일 때 <거문고도 바람도 다 끊어진 마른 냇가에 부서져 있다><어떤 꿈이 자유롭게 날으며 구걸할 수 있으랴>와 같은 「딜런·토머스」류의 절구가 매우 애석하다.
이탄의 『흔들리며』는 그의 안이한 재질이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서 소시민의 표정을 평범하게 진술하고 있다. 안정감을 준다.
한용운이 성공한 이래 경어법은 시를 실패하지 않게 하는 위선적인 수법이 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여기서도 적용되고 있다. 끝 부분의 <그래도 내일입니다><그래도 엄숙한 내일이…>의 내일이라는 돌연 변리의 어휘가 이 시의 「톤」을 무난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정서는 생활보다 두뇌에 더 반응을 일으키는 지도 모른다.
박제천의 『절창』은 시인이 언어의 긴장감을 통해서 깨어있는 상태의 배타적인 의식에 사물의 유동적인 현상을 대립시킬 때 볼 수 있는 피사체의 변형을 시도하고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언어가 사물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예리한 감수성을 수반한다. 그것이 『계속해서』에서는 고창의 「뉘앙스」를 도입함으로써 뜻밖의 지리산 웅조의 여유를 이루기도 한다. 다채롭다.
그러나 『상류에서』의 <나의 전 생애에서…><필사의> 따위의 혈연화 되지 않은 과장어 때문에 오히려 그것들이 지시하려는 의도를 죽여버린다. 그런 강도라면 <누구도 하류를 보지 못한다>의 단절감이 훨씬 효과적이다. 『다시 상류에서』의 <누가 던져놓은 한 덩어리 인광이 들끓더니><여울목쯤에서 한 무더기 달빚이 기다리고 있다> 따위의 수사는 큰 수확이다. 끝으로 신동집의 『귀환』을 비롯한 몇 개의 시집이 간행되었다는 것을 이달의 기념으로 명기해본다. 그러나 그것들을 본 감동이나 혐오감을 몇 줄의 산문으로 처리한다는 태도를 버렸다. 그런 태도가 불쾌하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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