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2)|중공군 개입(1)|운산의 첫 나팔소리|「6·25」21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미국이나 우리 한국이 가장 염려했던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은 그 동안의 구구한 억측을 깨고, 10월25일 실제 전투에서 확인됐다. 중공정권은 이미 9월 중순부터 북평 방송의 공식성명이나 중공주재 인도대사를 통해 『중공은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할 경우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사령관은 중공의 이런 경고는 「정치적 위협」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은 그가 10월15일 「웨이크」도에서 「트루먼」대통령과 회담할 때에 주로 전쟁종결후의 한국부흥계획을 이야기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공군 정예부대인 임표의 제4야전군은 바로 「웨이크」도 회담이 개최되던 날과, 그리고 유엔군이 서부에서 38선을 돌파한지 4일 후인 10월15일께부터. 속속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1차로 북한에 진주한 약 12만 명의 중공군 4개「군」중 3개 「군」 (9개 사단)은 미8군 전면에, 그리고 1개「군」은 미10군단 전선에 각각 침투, 배치되어 북진 중인 유엔군에 일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중공군개입에 관한 여러 정보가 단편적으로 입수됐지만 전기한 바와 같은 「맥아더」원수의 판단과 함께 중공군이 야간에만 은밀히 이동, 남하했기 때문에 유엔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을 처음으로 노출시켜 확인한 것이 운산 전투였다.

<주민들 없이 텅빈 운산면>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던 임표의 제4야전군은 우선 제1차로 미군보다 화력이 약한 중·서부전선의 한국군에 강타를 가하기 시작했다.
승승장구 북진하던 국군부대가 중공군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완전히 허를 찔리고 분산, 후퇴한 이 전투상황을 당시의 참전중대장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증언하고 있다.
▲한제근씨 (당시 1사단15연대 3대대7중대장=대위·전육본화학감·예비역준장·51)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을 향해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우리부대가 운산 남쪽 10리쯤 도착했을 때입니다. 웬지 예감이 좋지 않고 기분이 싸늘했어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부근 산 속에 중공군대부대가 기습을 노리고 잠복해 있었어요.
우리는 이런 무서운 복병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운산읍내로 진격해 들어갔지요. 10월25일 새벽인데 읍내는 텅 비어있어요. 운산에 오기까지 우리가 북진하면, 주민들이 모두 태극기를 들고 나와 열렬한 환영을 했는데 운산에는 주민들 그림자도 없어요. 그래서 한사람이라도 데리고 오라고 수색을 시켰읍니다.
한참 있다가 70여세의 노인 한분을 데리고 왔는데 그분 말씀이 어젯밤까지는 읍내에 중공군·북군·내무서원 등이 쫙 깔렸었는데 새벽이 되니 한사람도 안 보인다는 거예요. 중공군의 무장도 좋고 한바탕 할 기세라고 알려줍디다. 그러나 국군의 진격을 느리게 하려는 역정보라는 생각에서 누구도 그 노인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이날 하오에 그 노인의 이야기는 적중했지만요. 운산서 아침을 먹고 지원 나온 미「탱크」에 올라 타 배쪽으로 진격을 계속했어요.
10리쯤 북상했을 때 그다지 높지 않은 능선에서 맹렬한 사격을 받았어요.
박격포·기관총 등 잘 구성된 화망으로 평양이후 처음 당하는 조직적 저항이예요. 나중에 알았지만 여기가 바로 중공군의 전초진지였어요.

<고지마다 중공군 들끓어>
이때 연대본부에서는 중공군출현을 감지했는지 조재미 연대장은 후퇴명령을 내렸어요. 5리쯤 후퇴해서 산으로 올라가 보니 고지마다 벌써 중공군의 경계배치가 마련돼 있어요. 몇 놈을 쏘아 죽이고 시체확인을 해보았더니 틀림없는 중공군이예요.
그러나 적의 주저항선에 부닥친 것이 아니어서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또 북진했어요. 사실은 이때부터 전격을 멈추고 신중을 기해야 하는 건데 얼마 남지 않은 압록강을 보고 싶은 생각 때문에 올라간 거지요. 이날 하오3시쯤 운산 북쪽 20리의 북진광산에 도착, 3대대는 예비대가 되고 1대대가 교대해서 또 밀고 올라갔어요. 날은 저무는데 5만 분의1 지도를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현재의 위치를 모르겠어요. 광산일대는 지대가 높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꽉 차서 앞이 막혀 독도를 할수가 없어요. 나는 일단 내 7중대를 배치해놓고 연락병 2명과 함께 전방을 살피러 나갔어요. 어둑어둑한데 20m 앞 능선아래서 5, 6명의 중공군이 올라옵디다.
쏘아버리려다가 적의 규모도 잘 모르고 우리 중대 위치를 알리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두었어요. 그 놈들은 묘지 위에 엎드려 무언가 열심히 의논하는 눈치입디다.

<「전진을 「전진」으로 오류>
얼마 안 있다가 그들의 총공격이 시작됐오. 무전기에서 「까치 까치 15장 15장」하고 숨가쁜 소리가 들려요. 「까치」는 그날 밤 암호고, 「15장」은 나입니다. 무전기를 들었더니, 연대장이 직접 나왔어요. 「까치는 즉시 행동을 개시, 오늘 아침 연락장교 만난 곳까지 즉시 전진, 공격 개시하라」고 급히 전하고는 탁 끊어요. 나는 즉각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챘어요. 「전진공격」이란 용어를 썼지만 「오늘 아침 연락장교 만난 곳」은 20리 후방의 운산읍이예요.
이웃 중대에 연락할 사이도 없이 중대를 거두어 후퇴하기 시작했읍니다. 캄캄한 밤에 산을 타고 후퇴하는데 도처에 중공군이 꽉 차있어 수십 번 교전하다 보니까 내 중대는 분산되고 말았어요. 이렇게 한참 빠져 나오다가 적이 뜸한 곳에서 숨을 돌리고 같은 3대대의 이웃 중대인 9중대를 무전으로 불러보았어요. 중대장 박대위 (후에 전사)에게 「까치도 연대장 연락을 받았는가? 지금 위치를 말하라」고 물었더니 「연대장 명령을 받았다. 진격하는데 적이 없어서 막 올라왔다」면서 현 위치를 말해요. 그런데 현위치라는 것이 우리가 후퇴를 시작한 지점보다 훨씬 북쪽이예요. 참 기가 막힙디다.
연대장은 「전진하라」는 건데 「전진」을 한거예요. 「전진」은 태평양전쟁 때 일군이 만든 술어인데, 「후퇴」를 말하는 겁니다. 9중대는 오히려 적 후방으로 올라갔으니 저항이 없을 밖에요. 「이 돌대가리야, 오늘 아침 연락장교 만난 곳을 생각해봐, 즉시 돌아서 전진하라」고 소리치고는 무전을 끊고 나는 나대로 발을 옮겼어요. 동이 트기 전에 어제 점령 통과했던 능선에 도착했는데 10여명의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나팔을 붑디다.

<중대병력 하룻새 18명으로>
이때 나는 중공군 나팔소리를 처음 들었어요. 20m쯤 간격을 두고 「누구냐」고 소리쳤더니 낮은 중국말 몇 마디가 오가고는 후닥닥 하면서 우리편을 향해 사격을 가합디다. 길가 사각지대로 얼른 피했어요. 좀 있으니 주변에 아군 포탄이 마구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운산 남쪽 10리에서 쏘는 거예요. 이때야 나는 운산읍이 적에 빼앗기고 아군주력과 지휘부가 훨씬 남쪽으로 후퇴한 것을 직감했어요. 다시 산길을 타기 시작했는데 소나무에 사십자와 화살표가 적힌 종이가 꽂혀 있는 것을 보았어요. 중공군 40군단 선발대가 지나가면서 후속부대를 위해 표지를 해 놓은 거죠.
한참 내려가다가 조그만 산에 올라갔는데 둘레에 교통호를 파 놓고 호속에는 밀짚 이불 등을 깔아놓았어요. 그들은 다른 데로 이동해 호속은 비어 있구요. 이것만 보더라도 중공군은 벌써 여러 날 전에 잠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여기서 중대원을 점검해 보았더니 18명밖에 없어요. 하룻 새에 1백30명이 떨어져 나갔어요. 하도 기가 차서 울음도 안 나옵디다. 나는 호속에 나머지 중대원을 배치하고 더 이상 후퇴 않고 「게릴라」가 된다고 선언했어요. 그때 군법은 후퇴할 때 무기를 버리더라도 M1소총은 방아쇠를, 「박격포」는 「공이」를 빼와야만 처벌을 면할 수 있는데 많은 대원과 무기를 잃었으니 의당 총살감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결심을 한 거지요. 이때 부중대장 박영희 중위는 후퇴해야 한다고 주장합디다.

<미군들 국군장교에 매달려>
그는 초전에 고랑포에서 낙오, 적중에서 모진 고생을 한 사람이예요. 자기경험에 비추어 오랫동안 적중포위생활은 못한다는 겁디다. 그래도 내 고집대로 「게릴라」를 한다면서 밤이 돼 잠이 들어 버렸어요. 한참 자는데 하사 1명이 몰래 기어와 나를 깨우면서 「모두들 고집세우는 중대장을 즉결처분하고 탈출하자」고 합의를 보았다는 겁니다. 이제는 부하들에게 맞아 죽게 됐어요. 할 수 없이 대원들을 데리고 다시 남하를 서둘렀어요. 몇 천리 산길을 타고 26일 밤에 청천강변까지 내려왔는데 거기서 우리 15연대를 지원하던 미군 박격포 대원들을 만났어요.
이자들은 우리 경우와 똑같이 중공군의 포위기습으로 분산 후퇴했는데 장교는 없고 사병만 18명이예요. 한국군 장교를 만났으니 이젠 살았다면서 나를 부등켜 안으며 좋아합디다. 이들 중 한 명이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는 압박붕대를 풀어 내 등뒤 혁대에 매어 쥐고선 따라와요. 그러니까 딴 녀석은 그 미군의 허리띠에 또 붕대를 동여매고요. 밤이니까 나를 놓치면 큰일이라는 거죠. 이런 식으로 내 뒤에 미군18명이 한 줄로 매달렸어요. 이 꼴을 보자 우리사병들도 또 그 뒤에 매달리고요. 제삼자가 이 모습을 보았으면 참 우스웠을 거예요.
나는 다행히 평안도 출신이라 대강 지리를 짐작해 청천강물을 따라 조심스럽게 하류로 내려갔어요. 모래밭은 괜찮은데 자갈밭은 미군들의 「워커」구두소리가 요란해서 몹시 마음이 죄어집디다. 그래서 물 속으로 들어갔어요. 구둣발소리도 덜 나고 정체도 감추어져 좋은데 다만 물이 차서 온몸이 떨려요. 밤새 이렇게 물 속을 걸어 새벽녘에 영변군 박성면에 도착했어요. 강 건너에서 후퇴한 우군들이 화톳불에 옷을 말리는 것이 보입디다. 이젠 살았다싶어 강을 건너갔읍니다.
여기서 대대장 안병권 소령과 이선로 대위를 만났어요. 나를 전사자 명단에 넣고 막 보고할 참이었대요. 큰 피해를 본 우리 15연대는 박천서 집결, 재편했습니다.』
※정정=본 연재 2백회 본문기사 중 「한세복」씨는 「한세복」씨의 속기임. 2백1회의 장명덕씨 증언 중 『소 한 마리가「60원」은 「6백원」으로, 돼지「20원」은「2백원」으로, 「막걸리 한 섬」18원은 「소주 한 되」18원으로 각각 바로 잡습니다.

<주요일지>
(1950년 10월25, 26, 27일)※25일=▲국군1사단 중공군 1명 생포 ▲미 국방성, 중공군개입보도는 미확인이라고 발표 ※26일=▲미10군단 원산상륙 ▲국군6사단 5천의 중공군과 교전. 「맥」사령부는 부인 ▲대일 강화조약에 관한 미소회담 개최 ▲「트루먼」, 미군은 국경까지 진격 않는다고 언명 ※27일=▲미24사단 태천진격 ▲「맥 」사·8군사·미 국방·국무성, 모두 중공개입미확인이라고 재차 발표 ▲국군이 안주서 생포한 중공군 2만 이상이 북한 진주했다고 언명 ▲서울서 환도와 평양탈환 경축시민대회 ▲「맥」사대변인, 유엔군은 북한의 필요한 모든 지역까지 진격한다고 발표 ▲중공군, 서장침입 ▲「아이크」,「나토」사령관에 취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