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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현장취재…70만 교포 성공과 실패의 자취-미주(19)|각고로 쌓아올린 「파라과이」의 차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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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순시온」시의 거리를 달리는 시내버스를 보면 흡사 62, 63년대 서울의 시내버스를 연상케 한다. 철판을 두들겨 펴서 만든 「보디」에, 빨간 페인트칠을 한 버스 모습은 꼭 그 무렵 서울시내버스와 닮은 꼴이었다. 버스의 영세성도 마찬가지. 온종일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털털거리고 달리는 모습조차 서울의 버스사업처럼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해 보였다. 「아순시온」 시내에 살고 있는 한국교포 83가구 가운데는 일찍부터 시내버스의 운수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유흥석씨가 5대, 조성화씨가 3대, 안용진 권용재씨가 각각 2대, 전형길 최규상 김용태씨가 1대씩 우리교포 7명이 모두 15대의 시내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이들은 비록 운행 댓수를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은 아니나 그런 대로 『잔재미를 본다』는 대답. 그 가운데서도 버스 3대를 끌고 있는 조성화씨 (51·황해도 신천)는 서울 부산에서 자동차 부속품 상을 한 경험을 살려 가장 착실한 운영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조씨 자신은 『골치 썩이는 게 운수사업』이라고 싫증마저 내보였지만, 3년 사이 버스 1대를 3대로 늘렸다니까 그의 사업실력만은 대단했다.
65년 2월 11일 부산항을 떠나 배편으로 2개월 10일만에 「파라과이」에 도착한 조씨는 제1차 이민 케이스로 왔기 때문에 남보다 고생을 먼저 치른 편. 가족 5명을 데리고 「아순시온」에 들어섰으나 정착예정지로 정해진 「주구루」농장은 매매계약조차 맺어있지 않아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돼버렸다. 할 수 없이 그해 4월부터 6월까지 두 달 동안 「아레라」 호숫가에 있는 어느 공장 마당의 이민수용소에서 막막한 나날을 보냈다. 『두 달을 무료하니 보냈을 땐 눈앞이 아찔했었다』고 절망감에 부닥쳤던 이국에서의 수용소 생활을 되새기었다.
그가 「파라과이」에서 맨 처음 손댄 사업은 빗자루 만드는 일이었다. 언젠가 수용소에서 5km 떨어진 「산토렌저」라는 곳에 원주민이 경영하다 팽개친 빗자루공장을 눈여겨본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주인을 찾아가 교섭했더니 선뜻 월세 6천「과라니」 (한국 돈으로 약 2만원)로 빌어 가라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빗자루는 「라바초」라고 부르는 단단한 관목이 원료. 이 빗자루를 1개 깎는데 순이익을 3원 (한국 돈)씩 잡고 하루에 2천 개를 깎아 낼 것으로 계산했다.
월세계약을 맺고 막상 작업을 시작했으나 첫날엔 겨우 5백 개를 깎았고 이튿날에 2천 개를 간신히 깎았다. 그러나 빗자루 2천 개를 파는데 소요된 시간은 한달 이상이 걸렸다. 모처럼 용기를 내어 시작한 첫 사업은 개업벽두부터 어처구니없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히려 조씨의 사업보다는 그 가족들이 행상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훨씬 많았다. 그 무렵 대부분의 한국이민들은 의류와 자기류의 행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조씨의 노모와 부인도 날마다 「아순시온」시에 나가 옷가지 등의 행상으로 하루 3천 「과라니」(l만원) 가량을 벌어들였던 것. 이 때문에 먹고사는 걱정은 덜었으나 하필이면 빗자루에 손댔다 혼난 첫 사업의 실패는 좀체 만회되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목장 주로 있던 「파라과이」인 친구가 조씨에게 버스 사업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자동차사업은 일찌기 그가 한국에서 부속 상을 해봤기 때문에 두번째의 운수사업에는 쉽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집안의 돈을 모두 긁어모아 「메르세데스·벤츠」 2t짜리 차체를 조립한 시내버스 1대를 선금 1백15만원을 주고 샀다. 정원은 25명이나 50명까지는 넉근히 태울 수 있는 중형버스 였다. 「아순시온」의 시내버스 요금은 승객 1인당 한국 돈으로 20원, 조씨가 산 중형버스 의 합승요금은 30원꼴.
경영방식조차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지입제 회사였기 때문에 「막벌이」사업으로는 눈설지 않았다.
그가 맨 처음 투입한 노선 「아순시온」시 27번선 (전구간 50km). 조씨는 자동차의 온 부속을 빼놓지 않고 준비해 두었으며 타이어도 그때그때 여유 있게 저장해 두었다. 하루의 운행을 마치면 철야작업을 해서라도 차를 말끔히 경비해서 다음날 새벽부터 일찌감치 뛰게 했다. 정비를 게을리하는 「파라과이」사람들의 차는 번번이 쉬었으나 조씨의 차만은 연중무휴. 『내차는 불사신이었죠. 그렇게 1년쯤 운행하니까 한숨 돌리겠습디다』-. 그 1년 사이 차 값을 빼고도 남았다는 자랑이다. 「아순시온」의 운수사업방식은 하루 전 수입의 15%는 운전사의 몫. 보통 하루 7번을 뛰는 운행횟수 가운데서 차장은 한탕마다 1백50원 꼴을 자기 몫으로 차지한다.
그러나 순박한 「파라과이」차장들은 「삥땅」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얘기. 이렇게 따져 차주에게 들어오는 하루 수입은 평균 1만원 꼴, 한 달에 27만원에서 30만원 수입이 된다.
조씨의 사업은 날로 빈틈이 없어 지금은 「메르세데스·벤츠」형 3·5t짜리 3대를 갖게 됐다.
그의 성공이 알려지자 한국 교포들은 68년께부터 잇따라 운수사업에 투자, 현재 조씨를 비롯해서 7명이 버스 15대를 운영하고 있으나 한국교민회 관계자에 따르면 『나머지 사람들은 조씨처럼 통한 재미를 못보고 있다』는 설명.
작년엔 「파라과이」원주민 운수업자들이 한국인 운수업자가 늘어나는 것을 시기하고 총수입을 골고루 분배하자는 「자루나누기」식 (「파라과이」말=「볼사고문」)을 제의해 봤었으나 일축한 일이 있었다. 조씨는 원주민과 의견이 충돌 될 때마다 그들이 『너의 대사관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는 먼 이국에 온 설움을 새삼 느끼곤 한다며, 「파라과이」에 영사관이나마 설치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아순시온 (파라과이)=김석성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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