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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집" 하면 택시 알아서 내려주던 서울 명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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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설명 :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위치한 미아리 점성촌. 미아리 고개를 따라 점집 20여 곳이 길게 늘어서 있다. 1980~90년대 호황기에는 점집 80여 곳이 영업을 하며 “점 하면 미아리”로 통했다. 인터넷 등에 밀려 점집은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시각장애인들에게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 동영상은 joongang.co.kr [안성식 기자]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트로트 가요 ‘단장의 미아리 고개’의 한 대목이다. 노래 속 ‘눈물 고개’는 서울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역에서 경기도 의정부시 방향으로 5분가량 걸으면 맞닥뜨리는 낮은 고갯길. 한국전쟁 때는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다. 남과 북은 여기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다. 북으로 피랍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며 눈물을 쏟고 한(恨)을 품었던 곳이기도 하다. 흙먼지 나던 고갯길은 60여 년이 흘러 말끔한 아스팔트 길로 바뀌었다. 하지만 길 양옆에는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그 시절 풍경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한을 품은 사람들의 과거를 달래주고 불안한 미래를 내다봐주는 점집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속칭 ‘미아리 점성촌(占星村)’이다.

47년 된 ‘원조’ 이도병씨, 길거리서 시작

 지난 18일 서울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 점성촌은 한산했다. 집집마다 대문은 열려 있었지만 드나드는 손님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고가 옆길로 ‘백일홍’ ‘은하수여성사주’ ‘천도화’ 등의 간판을 내건 점집 20여 개가 줄지어 있었다. 그중 한 곳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손.님.왔.습.니.다.” 사람 음성이 아닌 뚝뚝 끊어지는 기계음이 들렸다. 이 일대 점집 대부분은 시각장애인들이 운영하고 있다. 앞 못 보는 주인들에게 기계음이 손님들의 드나듦을 알려주고 있다. 잠시 뒤 주인 권윤자(72·여)씨가 나왔다. 한복 차림이었다. 권씨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생년월일을 말해 주자 손으로 더듬더듬 점자로 기록된 사주팔자의 기준 달력인 월력을 되짚는다. “병인, 경사, 임진, 계사…”를 되뇌더니 이내 사주팔자를 줄줄 읊었다. 권씨는 “50년간 역술을 공부해 오며 웬만한 건 다 머릿속에 있다”며 “우리는 손님의 표정이나 행색을 살필 수 없는 만큼 주역 등에 기록된 내용과 경험을 토대로만 사주풀이를 한다”고 말했다.

1980~90년대 절정기엔 80여 곳 성업

 미아리 점성촌은 1960년대 말 형성됐다. 66년 시각장애인 역술인인 이도병(72)씨가 미아리고개 밑 굴다리 아래에 노상 점집을 차린 게 시작이다. 이씨의 점집엔 손님이 몰렸다. 이내 큰 성공을 거뒀다. 이씨의 ‘성공신화’가 알려지며 시각장애인 역술인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남산 기슭에 모여 살다 재개발로 터전을 잃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미아리에 용한 점쟁이가 많다는 소문이 퍼지며 1980~90년대에는 큰 호황을 누렸다. 동선동 일대에 차려진 점집만 80여 개나 되었다. 38년간 미아리에서 점을 봐 온 윤병관(67)씨는 “골목마다 점을 보러 오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며 “택시를 탄 손님이 ‘점을 보러 간다’고 하면 기사가 알아서 미아리에 내려줬다”고 말했다. 당시 미아리 점성촌엔 일본인 관광객도 북적거렸다고 한다. ‘미아리에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는 말도 이 무렵 생겨났다.

현재 30여 곳 남아 … 손님도 뜸해져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점술 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미아리 점성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점집은 30여 개로 쪼그라들었다. 이전과 다르게 사주풀이가 아닌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들이 점을 봐 주는 가게도 들어섰다. 하지만 시각장애인 역술인들은 여전히 ‘처녀보살’ ‘도사’ 같은 간판은 달지 않는다. 점성촌 역사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미아리 점성촌은 ‘서울 속 미래유산 1000선’ 후보에 올라 있다.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심남용 관장은 “이곳에서 점집을 하는 시각장애인들은 모두 역술을 공부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다”며 “각자의 삶의 터전인 이곳 점성촌을 앞으로도 잘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인 심 관장 역시 이곳에서 역술인으로 일한다.

글=안효성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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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골목 -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 점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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