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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8선 돌파와 북진>(10)「6·25」21주… 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원산 탈환>(상)

<월경 10일만에 원산에>
38선 돌파 후 아군이 제일 먼저 수복한 북한의 가장 큰 도시는 원산이었다.
미 제1군단 휘하의 한 미군부대가 평양을 향해 진격을 재촉하고 또한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 인천과 부산에서 각각 원산 상륙을 위해 한창 준비에 바쁠 때 바로 미 10군단의 목표인 원산은 10월 10일에 육로로 급진한 국군 제1군단 수중에 들어갔다.
동해안 양양에서 국군이 38선을 넘은 지 꼭 10일만에 원산을 완전 탈환한 것이다. 우연히도 서부에서도 38선을 돌파한 미 제1군단이 진격을 개시한지 꼭10일 만인 10월 19일에 적도 평양을 탈환한 것을 보면 동서부전선의 아군 북진 속도는 거의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원산탈환에 있어서도 1군단 산하의 사단간에 평양 입성 때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심각한 진격경쟁과 「1번 점령」을 둘러싼 「공명논쟁」이 붙었다. 심지어 같은 사단의 연대간에도 이런 「선의의 시비」가 붙어 증언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이 논쟁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당시의 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그 후 순직했기 때문에 제3사단과 수도사단간의「공명시비」는 오늘날까지도 숙제로 남아있다. 이 문제는 두 사단의 관계자들 증언을 듣고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두 연대 30분 간격 입성>
▲백남권씨(당시 수도사단 기갑 연대장=대령·예비역육군소장·현 인천제철감사·49) 『10월 10일에 신고산에 있던 사단본부로부터 원산공격작명을 받았어요. 안변에 있는 기갑 연대 병력을 움직여 이날 새벽 4시 원산시 입구에 있는 여왕산 공격에 나서 7시부터 전투가 벌어졌어요. 1개 연대 규모의 괴뢰군들은 대전차포와 무반동포 등으로 맹렬히 저항합디다. 여왕산 우측은 기갑 연대가, 그리고 좌측은 18연대가 맡아서 1시간쯤 격전이 전개됐어요. 적은 사수저항이라기보다는 지연저항인 것 같습디다. 한참 저항하더니 도망을 치더군요. 이래서 정확히 10일 상오11시에 시가지로 돌입했습니다.
약간의 시가전도 있었는데 수 백 명의 포로를 잡아 시가행진도 시켰어요. 우리가 시가지를 점령하고 나서 약30분쯤 후에 3사단 23연대가 들어옵디다. 불과 30분 차이인데 서로 자기네가 먼저 점령했다고 옥신각신했어요. 3사단에서는 하루 전날 저녁에 수색대를 보내서 원산비행장을 점령했다는 거예요.
l군단장 김백일 장군이 현지에 와서 수색대는 점령의 의무가 없는 부대이므로 수도사단이 먼저 원산을 점령한 것으로 본다고 현지 판정을 했어요(편집자 주=나중에 게재될 3사단관계자 증언과는 다름).
이어 시가지의 본 도로를 경계로 우는 3사단, 좌는 수도사단으로 「바운다리」를 정해주었어요. 전투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대부분이 피란 가고 별로 없습디다. 이날 밤 미군고문들과 자축「파티」를 열고 술을 먹는데 밤2시쯤 갑자기 괴뢰군 「탱크」 2대가 시가지에 나타나 총질을 해요. 사방에 경계배치를 해놓았는데 어디를 뚫고 들어왔는지 모르겠더군요. 결국 1대는 잡고 1대는 도망쳤어요. 원산을 돌아보니 해변에는 가마니에 넣은 시체가 수 백구 있어요. 형무소 안 우물에도 양민을 거꾸로 처박아 넣었구요. 모두 그들이 후퇴할 때 학살한 우익 인사들이지요. 「터널」속에는 미군포로 30여명을 가두고 양쪽 입구에서 불을 질러 질식시겼습디다.』
▲김종순씨(당시 3사단 제23연대장=중령 예비역육군소장·현 국방장관 특별보좌관·51) 『고성을 지나고서부터 우리 23연대는 22연대를 추월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원산을 향해 들어갔습니다.
10월 9일 하오7시께 허영순 소령의 제2대대가 동해안을 끼고 명사십리로 들어가 원산비행장을 점령했어요. 비행장에는 신형「야크」기 2대가 있어요. 기습을 당하니까 비행기롤 못 빼냈더군요. 나도 비행장 점령보고를 받고 그곳으로 갔어요. 난생 처음 보는 명사십리이지만 정말 경치가 절묘합디다.
밤 10시쯤에 시내 쪽으로부터 10여대의 적「탱크」가 포격을 가하며 비행장에 반격해 왔어요. 중과부적이어서 비행장을 포기하고 후퇴해 나와 밤을 지냈지요.
10일 새벽 다시 공격해 들어가 상오 9시에 비행장을 도로 뺏었어요. 이때 참모들은 빨리 원산점령무전을 사단본부에 치자고 성화였어요. 나는 10월 10일이 중국의 쌍십절이니 시간도 아주 10시 10분으로 해서 원산점령시간을 「쌍쌍십절」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떠오릅디다. 이때 「갈마」쪽을 내려다보니까 수도사단 기갑 연대가 막 몰려들어옵디다.
이렇게 해서 원산시내는 두 사단의 각 연대가 뒤범벅이 돼서 와글거리게됐어요.
나는 정각 10시 10분이 돼서야 사단본부로 원산점령이라는 무전을 쳤습니다.
하오에 각 사단본부와 군단본부가 들어오고 원산점령의 선후시비가 붙었어요.
김백일 군단장은 입장이 난처하니까 우리 3사단 23연대와 수도사단 기갑 연대가 원산을 공동으로 동시에 점령한 것으로 한다고 해요. 내가 좀 흥분해서 불평을 했어요. 그랬더니 김백일 장군은「내가 신임하는 자네까지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화를 냅디다.
여하간 이래서 원산점령은 3사단 23연대와 수도사단 기갑 연대가 공동으로 했다는 벽보를 붙이기 시작했어요. 우리 3사단의 수석미군고문 「에메리치」중령은 통역장교로부터 벽보내용을 얘기 듣더니 「갓·댐」이라고 버럭 화를 내면서 자기가 쫓아다니며 벽보를 떼는 촌극도 벌어졌어요. 김백일 군단장은 원산점령의 공로를 치하한다면서 나를 원산지구 방위부대장에 구두로 임명했어요. 시내에 들어가니까 큰 양조장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카바이드」로 소주와 막걸리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머루 주를 담가놓았더군요. 「카바이드」술은 다른 부대에 주고 머루 주는 우리연대만 마셨어요. 이걸 알고 군단본부에서는 「파티」가 있으면 늘 머루 주를 보내라고 해서 애먹었습니다.』

<포로는 대부분 남한 출신>
▲김상균씨(당시 3사단 22연대 제1대대장=대위·현 병무청 징모 국장=육군소장·45) 『38선을 넘을 때는 꼭 외국에 들어가는 기분입디다. 불과 5년만에 그만큼 소외감이 생긴 거예요. 「이데올로기」의 차란 참 무섭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나는 일손이 바쁜 이북 농민들에게 농사가 잘 됐느냐고 묻기도 했어요. 농부들은 「그저 그렇지요」라는 식으로 덤덤해요. 원산공격은 우리 22연대가 정면공격을 맡고, 23연대는 동해안쪽을 담당했어요. 우리 연대 앞은 훤한 들판인데 서부 능선 쪽에서 적의 완강한 화력저항이 있었어요. 논둑에 쌓아놓은 볏단을 은폐물로 이용하면서 포복 전진하여 이 능선을 점령하고 40여 문의 각종 포와 수 백 명의 적 포로를 잡았습니다.
포로는 거의가 이남에서 의용군으로 끌려간 젊은이들이어서 현지에서 석방하여 고향에 보냈어요. 수용소에 보내기도 안됐고, 그렇다고 우리가 데리고 다닐 형편도 못됐으니까요. 이튿날 아침 논두렁에 적으로부터 노획한 포를 진열, 전시해놨어요. 여왕 산을 공격목표로 계속 진격해 올라가다 보니까 수도사단병력이 차량으로 밀려들어옵디다. 우리는 산발적인 적 저항을 격파하면서 도보로 진격했기 때문에 수도사단이 우리연대보다 먼저 원산으로 들어갔어요. 「입성1번」 시비로 군단사령부에서 회의를 열었어요.
나는 우리 22연대장 김응조 대령을 따라 사령부로 갔습니다. 회의를 끝마치고 나온 김 연대장은 우리 3사단이 먼저 원산을 점령한 것으로 판결이 났다고 좋아합디다.
원산시가에서는 적의 큰 저항은 없었지만 기상대 고지에서 적 육전대(해병대)가 최후발악을 하더군요. 이 고지 바로 밑에 적 육전대 사령부가 있었어요. 고지가 가파르고, 입구도로에는 지뢰가 매설돼 있어 이 적을 제압하는데 4, 5일은 걸렸어요. 적들은 패주하면서 국군포로를 방공호 속에서 학살했는데 시체를 보니 모두가 피골이 상접돼있어 울었습니다.』

<명사십리 마을서 연설>
▲하상만씨(당시 한국군 제1군단장 미군수석고문통역관=중위·현 호남정유 총무부장·43) 『나는 늘 김백일 군단장과 미군 고문 「매케일」중령과 한 「지프」를 타고 다녔어요. 그러나 3사단과 수도사단간의 원산탈환에 관한 「공명시비」는 잘 모르겠어요. 원산에 들어가 어느 학교에 급히 마련된 군단사령부에 도착했어요.
하루는 한 미군소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군단사령부에 왔어요. 미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하려는데 기뢰가 많이 깔렸다기에 현지 답사하러 왔다는 거예요. 그래 내가 직접 「지프」를 몰고 미 해군소령과 함께 명사십리해변으로 달려가 봤어요. 조그만 마을에 당도했는데 주민들이 겁을 먹고 모두 뒷산으로 피란을 갔어요. 손짓으로 모두 오라고하니까 하얗게 모입디다.
공회당에 모아놓고 내가 일장 연설을 하면서 기뢰에 관해 알려달라고 했어요. 몇 사람이 기뢰 부설에 노력동원을 당했다고 하면서 아직 매설 못한 수천 개의 기뢰가 쌓인 산 방공호 속으로 안내를 해주더군요. 기뢰는 모두 소련제로 전마선이나 해변가에 「레일」을 깔고 부설했다고 합디다. 기뢰 전문가인 그 미 해군소령은 주민들 말을 자세히 「메모」해 가지고 돌아가 그 이튿날부터 기뢰 제거작업을 시작했어요.
미 해군전사에는 그때 내가 공회당에서 마을사람들에게 일본말로 연설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터무니없는 오보입니다. 나는 일본말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안다해도 왜 남의 나라 말로 합니까. 그때 내 말을 듣고 감격해 자진해서 기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던 주민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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