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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싶은 이야기들(186)<제13화>방송 50년(15)이덕근<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쟁협력방송>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총독부는 한국의 저명한 인사들을 방송국 「마이크」앞에 끌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때 방송국에 끌려나온 사람이 읽는 원고는 물론 자신이 쓴 원고도 아니며 사전에 검열되는 것이지만 이때의 검열에서는 삭제하는 대신 첨가하는 것이었다.
즉 『미국과 영국을 무찌르자』고 하는 말은 어디에나 빠지지 않았는데 원고 검열자들이 문구 앞에 꼭「귀축」이란 말을 빨간「잉크」로 써넣곤 했다.
44년으로 기억되는데 하루는 방송국의 연사대기실에서 백 모씨와 고 모씨가 끌려나와 초조히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다. 두 분은 포로같이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고 불안에 가득 차 있었는데 방송이 끝난 뒤『일생에 한번 오점을 찍었다』고 한숨쉬는 것을 보았다.
방송국의「프로」를 짜는 것은 편성과의 일이었지만 명사들을 전쟁협조방송에 불러내는 것은 편성과의 일이 아니었다.
편성과에는 촉탁 같은 형식으로 와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때로서는 경기도 경찰부 고등계소속의 앞잡이이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들은 대개의 경우 공갈로 명사들을 끌어내곤 했다. 『나와서 방송해 주시오』하면 선선히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못 나간다』고 버티는 것도 형편상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몸이 『아프다』든가 핑계를 대고 피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때마다 이 앞잡이들은 이『방송을 원하는 것은 「소노스지」』(그쪽=당국이란 뜻) 라고 말하면서 이 청을 거부하면 재미없다는 것을 암시했던 것이다.
이 방송에 자주 나온 사람으로는 한상룡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이른바 국민총력조선연맹사무총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직함에 비해서 일본말에 서툴러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이 일본말로는 「간소오류우」라고 발음해야 되는데 「류우」발음이 안되어 「간소루」라고 말하곤 해 「간소루」란 별명이 붙어 화제가 되었다.
방송국에 나와서 배짱을 보이기는 l941년 소위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지 20일 만인 12월 29일 「싱가포르」 함락 때 축하방송에 끌려나왔던 서춘씨였다.
매일신보의 주필이던 서씨는 전승을 축하하는 강연을 하게되었는데 방송국에 오기 전에 축하연회장에 들러 술을 흠뻑 마시고 곤드레가 되어 방송국에 왔었다.
서주필이「마이크」에 서자 「아나운서」가 『서춘씨의 강연이 있겠습니다』고 소개를 했으나 연사는 소개가 있기 전부터 잠들어 코고는 소리만 방송됐다.
방송국 측은 당황하여 연사와 같이 중대한 책임을 질 각오를 했으나 총독부를 비롯한 일본정책당국이 워낙 승리에 취해 들떠있던 판이라 크게 문제삼지 않고 어물어물 넘겨 버렸다.
좀 오래된 일이지만 1934년 권덕규 선생이 조선어강좌를 맡았을 때 한번 술에 취해 「마이크」앞에서 잠든 사고가 있었다.
권덕규 선생은 워낙 술을 좋아하여 운전사 민병선이 술집에서 모셔오기 일쑤였는데 이날도 약주를 과하게 잡숫고 방송국에 왔던 모양이다.
「아나운서」가 『지금부터 강연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소개하고 「마이크」를 권 선생에게 돌렸으나 권 선생은 머리를 수그리고 말이 없었다.
초조한「아나운서」가 『선생님 시작하시지요』하고 독촉하니 권 선생은 갑자기 큰 소리로 『왜이래』하고 소리쳐 이 말이 강연을 들으려던 청취자에게 울려 나갔다.
아마도 선생은 술집으로 착각했던 모양인데 서춘씨의 방송사고는 이 고사에 이어 두 번째였던 것이다.
강제된 전쟁협력의 방송이 한창이던 44년 6월에 문제안 기자가 한번, 용기를 냈다가 식은땀을 흘린 일이 있었다.
한국인 「아나」와 기자들이 있는 제2방송과는 소위 국어상용으로 한국말 사용이 금지된 가운데서 마지막까지 우리말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고장이었다.
이때 제2방송과에는 일본사람인 「이와기」(암성) 라는 감청 직원이 한사람 있었는데 그는 한국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는 사람이었다.
「사이만」도에서 일본군이 전멸한 날이었다. 윤용로·윤길구씨 등 여러 사람 있는데 문제안 기자가 취재에서 돌아오자 마자 동료들에게 일본군이 「사이만」도에서 옥쇄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야 그 새끼들 다 죽었대!』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와기」는 다 알아듣고 있는데 과장인 이혜구씨가 사태가 위급함을 느끼고 변소가는체-문제안씨 등 여럿이 있는 대로 지나가면서 『국어(일본말)로 말해요』하고 눈짓하고 지나갔다.
문제안씨는 이혜구씨 말이 일본말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말조심해』하는 경고의 뜻인 것을 알고 식은땀을 흘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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