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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학계서 심판 받는 한국학의 성과-하와이 대「국제학술회의」발표 논문초(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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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청동기 시대>김정배<고려대 교수>
한국의 선사고고학에서 청동기시대의 연구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연구경향을 띠고 있다. 과거 일인학자들은 한국에 청동기가 존재치 않는다고 결론짓고 있었으나, 한국학계를 위시해서 지금의 일본에서는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인정하는데 모두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
일인들에 의해서 김해 구총이 발굴된 결과 소량의 석기와 다량의 철기가 출토된 바 있었다.
그들은 이 유적을 금석 병용기로 성격규정을 내렸었다. 그런데 금석병용이란 용어는 석기와 청동의 일시적 혼재기간을 일컫는 술어임에도 청동기시대를 지나 철기가 다량으로 나오는 김해 구총을 금석병용기로 명명한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중국문화가 서북한국 지방에 영향을 주었다는 가세 내지 확정아래 우수한 북쪽의 전속문화와 남쪽의 석기문화를 대비시켜 해석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금속문화의 유물이 나오는 것은 선진국의 것이고, 이를 모방한 석기문화가 사착 한국인의 문화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석기시대에서 바로 철기시대로 넘어갔다고 보았다.
그러나 1945년이래 한반도 전역에서 청동유물이 속속 발굴되거나 수집됨으로써 한국에도 청동기시대가 존재한다는 확증을 갖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북한지역에 청동기시대를 설정하고, 남쪽은 설사 있었다해도 일시적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일본의 청동기문화인 「야요이」(미생) 문화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주민과 문화의 토대 위에서 성립되었음을 장기 한다면, 남쪽에도 당연히 청동기시대가 상당기간 존속했음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이 시대의 토기로는 무문토기가 대표적이고, 흑도도 보이기 시작한다. 한국에 청동기가 존재한다면 그 상한이 어디냐, 또 어디서 기원한 것이냐 하는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남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는 석관묘를 볼 때, 이것이 이미「시베리아」 청동기시대의 한 시기인 카라수크 문화에서도 보인 것이다. 이 문화의 존속기간은 대체로 BC 1천3백∼BC 8백년인데「에트마」는 BC 8백 년대에 석관묘가 카라수크 문화의 특징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일본의 미까미(삼상차남) 가 북만주 석관묘의 연대를 BC 4, 5세기께로 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한국에는 훨씬 늦게 연대를 보려는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토기만 보더라도 신석기시대 유문(즐문) 토기의 밑이 둥근데 비해 청동기시대 무문토기의 밑이 편편한 것도「시베리아」청동기시대의 토기에서 반복되는 현장인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한국의 무문토기나 청동기의 기원은「시베리아」와 연관되는 것이고, 연대도 BC 1천3백년을 전후하는 상한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청동기 문제에서 소홀히 넘길 수 없는 것이 이 문화와 담당자가 누구냐 하는 난제이다. 앞서 존재했던 신석기 문화가 주로 하반이나 해안지역에서 이루어졌음에 비추어, 우리는 이들이 고「아시아」족과 관련을 갖는 것으로 본다. 청동기의 문화는 신석기와 대조적인 현상이고 또 문화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전자와는 달리 역사상에 나오는 예맥족으로 보고자한다.
이처럼 청동기의 주민이 사상에 나오는 민족과 연결되고 또 도구의 재료가 청동이라는 분업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에서, 이 문화단계가 적어도 고조선 단계에 해당함은 확실하다.
이들 주민이 남긴 묘제가 돌멘·석관묘·옹관 등인데 부분적으로는 멀리 인도문화와 유사한 점이 흥미로운 사실이다. 연해주 일대의 청동문화가 훨씬 오랜 기대 연대를 갖고 있는 만큼 앞으로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기원문제에서부터 일본에 건너가 「야요이」문화로 이룩한 사실 등 폭넓은 지역의 자료와 지식 위에서 연구돼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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