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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시가전 <상>|서울 수복 (3)|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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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4면

9월25일 저녁에 적의 서울 방어 주저 항선은 무너졌다. 미 제5해병 연대와 한국 해병대는 격전 끝에 연희고지 일대의 「서부 방벽」을 돌파했고 미7사단 32연대와 한국군 17연대는 이날 새벽 서빙고에서 한강을 도하, 남산 고지를 점령하면서 동남방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미 제1, 제7해병 연대도 계속 도하해서 시가전에 참가했다.
누가 보아도 이제 적은 서울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북괴군은 「서부 방벽」이 무너졌지만 그 동안 시민을 강제 동원해서 미친 듯이 구축한 진지에 틀어박혀 완강히 저항했다. 즉 북괴군은 거리의 5백m마다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양측의 건물과 가옥을 「토치카」로 이용하여 시내로 들어오는 「유엔」군에 저항했다. 이런 「바리케이드」를 한 개 소탕하는데 보통 한시간 이상이 걸렸다. 해병대 기가 「바리케이드」 뒷면에 포진한 적을 제압하고 공병이 지뢰원을 제거한 다음 「탱크」가 진격, 「바리케이드」를 뚫으면 뒤따르는 보병들이 양측의 건물을 하나하나 소탕해나가곤 했다. 그때 북괴군의 포진과 축성술은 다분히 2차 대전 때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수비에서 본을 본 것으로 추측됐다.
그럼 이제부터 미 해병대가 연희고지 일대를 돌파한 후의 시가전 상황을 들어보겠다.

<한국 장교 미군 중대 지휘>
▲김정득 씨 (당시 미 제1해명사단 제5연대 3대대 배속 통역 장교=중위·현 공인 회계사 (CPA)·47)『북아현동으로 진격해 들어오니까 패잔병들이 골목마다 저항을 합디다. 아현동에는 당시 이기붕씨나 함태영씨 같은 요인 댁과 교회가 있어 폭격이 금지돼 있었어요. 이때 고궁·형무소도 폭격이 엄금됐고요. 함태영씨 댁 근처에서, 괴뢰 내무 서원을 한명 잡았어요. 자기는 할 수 없이 무역했다면서 보안 서원들이 숨어 있는 어느 집 지하실을 안내합디다. 7, 8명이 숨어 있는 것을 끌어내서 패잔병 수색에 이용했읍니다.
이들은 이 공로를 참작해서 모두 현지 석방했어요. 이때 석방한 사람 중에는 현재 정부 고관도 있어요. 아현동 고개 전투에서는 중대장의 왼팔이 적탄에 날아가 내가 잠시 미군 중대를 지휘하기까지 했어요.
서대문에 들어서니까 독립문 위에서 적이 총을 쏘아대요. 2대의 미「탱크」에 연락해서 독립문 20m 전방에서 15발 정도 폭격을 가했더니 2명의 괴뢰군이 위에서 뚝 떨어집디다. 이때 독립문이 안 넘어진게 천만 다행이었어요. 포를 쏴 데니까 들썩들썩하면서 금방 넘어질것 같더군요.
그 다음에는 냉천동으로 내려가서 관상대 쪽으로 올라갔어요. 이때 서대문 신학교 옆에서 미 해병 한 명이 정찰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변소에 빠졌어요. 언덕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드럼」통으로 된 변소 속에 그대로 쑥 빠진 거예요. 새 군복을 가져올 겨를이 없어 「팬쓰」만 남기고 홀랑 벗은 알몸으로 철모에다 총만 들고 싸웠어요. 총성이 콩볶듯하고 바짝 긴장하니까 웃음도 안 나옵디다. 그자는 「갓·댐」소리를 연발하더군요. 당주동 골목에 나오니까 웬 할머니가 만세를 부르며 치마를 갖다가 둘러줍디다.
광화문 못미처까지는 그 미병은 이런 해괴한 모습으로 싸우다가 거기서 괴뢰 내무 서원이 버리고 간 옷을 걸쳐 입었어요. 당주동에서는 내가 다니던 서울상대의 이상당 학장 댁을 찾아가 보았읍니다. 사모님만 계시기에 내 신분을 밝히고 어디 가셨느냐고 물으니까 마룻장을 엽디다. 마루 밑에 깊이 5m나 되는 굴속에 숨어 계시던 이 학장과 박술음 (현 외대 대학원장) 선생님이 하얗게 바랜 얼굴을 내미시더군요. 어찌나 반가운지 서로 껴안고 울었어요.
내 「레이션」과 다른 미병들것도 얻어다 드리고 그 댁을 떠났어요. 27일에 미해병 7연대와 광화문에서 합류해서 중앙청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은 한국 해병대의 시가 전투담.

<배호 잊어 무전 끊기기도>
▲김종기 씨 (당시 해병 제2대 대장=소령·예비역 해군 대령·현 흥국생명 상무·45) 『우리 대대는 24일에 마포에 들어가서 영등포서 도하한 미 해병 제1연대에 배속됐어요. 이때의 우리 작전 구역은 서울역∼조선호텔∼동대문으로 나가도록 돼 있었어요. 시가전은 우선 미 해병대가 맹포격을 가하며 나가면 우리는 소탕전을 벌여 잔적을 처리했어요. 25일 전투 때는 7중대가 도중에서 행방 불명이 됐어요. 중대장 연락병이 영어 암호를 잊어버려 무전 연락이 한동안 끊어진 거지요.
이날 밤에는 청파동의 김효석 (납북) 전 내무장관 댁에 대대 CP를 두고 잤읍니다.
26일 아침에 서울역 앞에서 5중대가 적과 맞붙어 격전을 벌였어요. 남대문 지하도와 대한여행사에 적1개 소대가 잠입했다가 완강히 저항합디다. 대원이 화염 방사기를 가지고 육박해 들어가 섭멸했어요. 이 전투에서 우리는 한 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했어요. 아다시피 우리 해병대 신병들은 대부분이 시골 사람들로서 서울이 처음이었어요. 보이는 게 모두 신기 하니까 전투 중에도 거리에 서있는 전차를 멍청히 서서 바라보고 심지어는 만져보기도 해요. 미 해병들은 이걸 보고 한국 해병대는 아주 용감하고 여유 만만하다고 칭찬이 대단했어요. 정말 우스운 이야기지요.
26일 저녁에 조선「호텔」에 들어가 대대 본부를 설치하고 명동쪽을 바라보니까 포탄이 떨어지고 불바다입디다.
밤 중에 「웨이터」가 「코피」를 끓여가지고 왔어요. 웬거냐고 했더니 괴뢰군은 「코피」를 안마셔 그대로 남아있던 거래요. 이 「웨이터」는 내가 신분 보장을 해주고 조선「호텔」에서 계속 일하도록 해주었읍니다.』
▲문익순 씨 (당시 해병 제1대대 화기 중대원·현 제주 우체국 통신 과장·39) 『우리 신병들은 분대장이 돌격하면 그저 무조건 돌격할 뿐이었읍니다. 미군들은 돌격 때에도 뻣뻣이 서서 나가서 그러면 위험하다고 서투른 영어에 손짓발짓으로 가르쳐주었어요. 하지만 괜찮다고 합디다. 연희고지를 거쳐 아현동 쪽으로 내려오니까 시민들이 어떤 집에 괴뢰군이 숨어있다고 일러주어요. 1개 분대가 그 가옥을 완전히 포위하고 나는 정문을 맡았어요. 그리고는 일제 사격을 가했더니 적병 한 명이 엉겁결에 장총을 쥔 채 정문으로 뛰어나옵디다.
나는 미처 총을 쏘지 못하고 적 총을 그대로 꽉 움켜잡았어요. 이래서 육박전이 벌어졌는데 내가 먼저 박치기로 받았더니 적은 넘어지면서 뒹굽디다. 재빨리 「카빈」으로 적을 쏘았어요. 순화 병원에 들어가 보니까 2백여명의 적 부상병이 누워있어요. 벌써 숨이 끊어진 자도 꽤 있고요. 급하니까 부상병을 방치한 채 도망간 거지요. 서대문에 이르렀을 때 또 주민으로부터 이웃집에 괴뢰군이 숨어 있다는 신고를 받았어요. 잡으러 들어가니까 3m나 되는 담을 단숨에 뛰어 넘어 뒷집으로 도망쳐요. 결국 다음 집에서 잡았는데 중공군 출신 괴뢰병이예요.
아무리 문초해도 중국말로만 몇마디 중얼댈뿐 우리말을 몰라서 미군에 넘겨주었지요』
▲김남주 씨 (당시 해병 제2대대 7중대원·현 제주도에서 사업·43) 『우리들이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내려놓으니까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중대장이 「이제부터 서울공격이다」해서 그런가보다 했지요. 아현동 못 미쳐서 피란민들이 철둑을 넘어 몰려왔어요. 이땐 일단 모두 잡아서 포로 취급을 하도록 돼 있었어요. 40대쯤 돼 보이는 분을 한 명 붙들고 문초하니까 우리가 제주도 말을 하는 걸 듣더니 반색을 해요. 알고 보니 3소대의 정병일 전우 아버님의 친구분입디다.
25일 마포 쪽으로 와서 고개에 이르니 적들이 굴을 뚫어놓았어요. 이 굴속 옆에다 개인호를파고 야영을 했는데 밤 11시쯤에 우마차 소리가 들려요. 우리 분대원들이 10여분간 일제 사격을 가했더니 우마차를 몰고 오던 자들이 모두 도랑으로 굴러떨어집디다. 가보니까 2명의 괴뢰병이 강제 동원한 인부를 시켜 굴속의 적들에게 저녁밥을 싣고오던 참이었어요. 생포한 적병에게 물었더니 낮에 굴속에 있는 부대가 저녁밥을 해오랬대요. 굴속의 적은 이미 다 도망치고 없고요.
미군 「레이션」만 먹다가 방을 보니 모두 달려들어 막 퍼먹었지만 많이는 못먹겠습디다.
나는 여기서 적들이 파놓은 함정을 잘못 딛고 떨어져 부상을 했어요. 밑에는 몇길되는 골을 파놓고 위만 흙으로 살짝 덮어놓았더군요. 월남전에서 「베트콩」이 쓰는 것 같은 함정의 일종이에요. 또 일에 인천 앞 바다의 「덴마크」병원선에 후송됐다가 다시 일본 동경의 미군 병원으로 건너가 1개월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일본의 미군 병원에서는 괴뢰 부상병 3명을 만났어요.

<시민들이 열광적인 환영>
미군들이 포로로 잡은 적 부상병을 일본까지 데려다 입원시킨 거예요. 일체 우리와는 접촉을 안시켰지만 대우는 우리와 꼭같이 해줍디다. 식사나 피복은 다 같아요. 나는 지금은 미국인들의 인도주의에 감탄하고 있지만 그때는 잘 이해가 안갑디다.』
▲오여화 씨 (당시 해병대 제5대대 22중대원회 예비역 해병 중령·현 제주도 서귀포에서 과수원 경영·42) 『김성은 대령이 이끄는 우리 대대는 통영 작전을 마치고 제1, 제2, 제3대대보다 며칠 늦게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 시내에 들어서니까 시민들이 열광적인 환영을 해주어서 정말 감격했어요. 아이들은 복장이 같으니까 우리를 미군인줄 알고 「핼로·핼로」하며 쫓아다닙디다.
사실 이때 우리 17, 18세의 학도병들은 M·1 소총을 어깨에 메면 땅에 질질 끌릴 정도였어요. 우리는 처음에는 미군 암호를 영어로 함께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해병대가 거의 제주도 출신이어서 우리 사투리를 썼어요. 「허벅」(물동이) 「놈비」(무우)식으로 암호를 쓰니까 영어보다도 오히려 더 잘 기밀이 지켜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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