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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이슈…성년 한국의 정치 의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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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월도 선거의 달. 「계몽적 사명」을 다하려는 의도에서인지 「월간중앙」은 특별 설문 「나의 정치 고백」과 「알먼드」류의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이영호씨의 「선거 소외 감속의 정치 의식」을, 「세대」는 한국 정치 문화에서 본 투표의 뜻을 밝히고 있는 최창규씨의 「무엇이 투표 의사를 결정하는가」를, 그리고 「신동아」는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의의」를 싣고 있다.
이씨는 갤브레이드 교수의 주장, 즉 부의 편재가 심하고 국민의 정치 의식 수준이 낮을 때 대의 제도를 위한 선거는 『부유층의 부패군에 의한 특권층을 위한 정치』가 되고 만다는 문제 의식을 제기하면서도 그로부터 도피하여 투표 행태의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의 투표 형태의 특리성을 투표율이 높은 「피동 투표 참여」라는 말로서 표시하고 「능동적 투표 참여의 보편화」에 「성년 한국의 체모」를 맡기고 있다. 물론 그에 있어 「능동적 투표 참여의 보편화」를 위한 날카로운 사회학적 통찰은 포기되고 있다. 좀 입장을 달리하여 최씨는 한국 정치 문화의 성격을 서구적 경쟁 질서와 전통적 주종의리의 결합에서 찾는다. 여기에서 민주 제도를 「완전한 가치」로 신봉하는 의식과 역사상 지나친 수혜 의식이 민족적 자주화 과정을 해쳐왔음을 문제시하면서 「탈 정치적 회의」를 설명한다.
이와 관련해서 과거의 투표 행태가 자기 주장 없이도 투표에 임하는 「타의 추종적 의무형」이나 비정치적 의도에 기인하는 「현실 추구적 참여형」에 의하여 지배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최씨는 『선거는 사회 가치의 극히 적은 일부분인 정치만을 결정 짓는 최소한의 선택으로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동 투표 참여」라든가 「타의 추종적 의무형」이라는 「계몽」을 위한 유형학적 명칭의 제시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왜 그렇게 사회 구조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문젯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사회학적인 문제의식이 제기된다.
이상희씨는 그의 글 「한국 사회도 대중 사회인가」 (세대)에서 「대중 사회」론을 비판적 입장에서 문제시하면서 한국에 있어서의 대중 사회적 상황이나 대중화 현상을 설명한다. 그는 우선 기계 기술의 발달이나 산업화 현상 자체 속에 대중 사회의 성립 요인을 찾는 「체제 색맹」을 『사회·경제적 구조면에 있어서의 문젯점을 은폐하고 현실에 대한 오진을 가져올 염려』가 있다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한국의 대중화 현상은 주로 8·15 해방을 계기로 미국의 정치 문화권이 한국사회를 휩쓸면서 미국으로부터 직수입된 것이며 한일 협정 이후에는 이중으로 휩쓸고 있다한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 사회의 대중화 과정은 외부적인 요인에 기인하기 때문에 「타자 지향적 인간형」은 단순히 대중 사회적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래적 가치관에 대한 추종이나 사대주의 풍조를 몰고 옴으로써 「민족적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하여 외국 지향적 사회 풍조를 북돋우는 매스·미디어를 비판한다. 『한국에서 방영되고 있는 외화 중의 대부분은 미국의 것이며, 텔레비전·필름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미국의 팝송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의 젊은이들을 사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민중들로 하여금 현실 도피케 하는 대중 문화 현상을 비판하면서 대중화 과정의 긍정적 측면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씨의 이러한 소론과 관련해서 독자의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은 정담 「한국의 주체 사상」 (세대)이다. 특히 추상적인 「힘의 철학」만 강조하는 박종홍씨와 그의 견해에 파고드는 강원룡씨의 견해 대립이 흥미롭다. 『민주적 바탕이 아닌데서 생성되어 올라온 것은 민족 주체성이라 할 수 없다』는 강원룡씨의 입장은 『대중은 결코 외래적인 이데올로기에 물들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뒷받침 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냉전 사상의 극복」에서 주체 사상의 자리를 구하려는 그의 태도를 읽어볼 수 있다.
강씨의 주장과 관련해서 문제될 수 있는 글은 김영모씨의 「공업 엘리트와 농업 엘리트의 갈등 현상」 (세대) 이다. 그는 우리 나라의 이원적 경제 질서 하에서 공업 엘리트에 대한 농업 엘리트의 사회적 불만이 있기는 하나 도리어 농업 엘리트의 공업 엘리트에의 동조화 현상이 나타남으로써 엘리트와 대중간의 사회적 갈등이 현재화되어 있는 것으로 추리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사회적·경제적 격차가 심한 현 상태에서 안정과 성장 또는 균형 발전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격차의 해소를 위한 노력과 그 기반에서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대중화 현상에 대한 비판은 흔히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염무웅씨는 그의 글 「한국 문인의 생태와 병리」(월간중앙)에서 『작품을 읽으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마련하는 위기를 회피하는 독자, 진실을 덮어 가림으로써 위로해 주고 진실에의 감각을 마비시킴으로써 쾌락을 찾는 독자는 바로 그런 문학 아닌 문학을 만들어내는 작가와 야합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먹고 배설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세계, 필수품들로만 이루어진 메마른 세계의 노예가 되는 길을 택하는 것』이라고 문인의 「생태와 병리」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지명관씨도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를 고발하는 시민 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는 언설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부터 오늘의 우리 나라 지식인이 『소시민적인 대중적 안일에서 탈피할 수 없을 만큼 체제 내로 스며들어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결론을 버리기 위해 『그때는 진보나 개혁에 대한 체념이 나타난다. 1960년 초에 그래도 4·19의 꿈을 버릴 수 없어 저항하던 지식인들 사이에 패배감과 반동이 찾아오고 그들은 거기에서 적당한 타협을 찾았다. …l960년대의 좌??의식 속에 소시민적인 안주를 찾으려는 정신이 엄습해 왔다』는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정치적으로 출구를 막힌 지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사실 그 모든 상황에서 오는「비지식인화」하려는, 어떤 의미에서 내면적인 자기 보존의 본능이 더욱 문제』라고 한다 (「신동아」의「지식인의 굴절과 안주」).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불행히도 대중 인텔리들의 사회적 발언권이 없다』는 최석변씨의 말과 이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 아닐까 ( 「세대」의 「한국의 주체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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