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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양로원의 「어머니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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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머니날」이 오면 모든 어머니들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자녀들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자식을 둔 기쁨, 어머니를 가진 기쁨, 자신이 진한 혈연 속에 있다는 자각이 가슴을 두드리는 날이다.
그러나 「어머니날」 아침엔 더욱더 가슴이 비고, 5월의 신록 빛나는 태양 속에서 목이 메는 어머니들도 있다. 자녀를 잃은 어머니, 어머니가 되어본 일이 없는 할머니, 자녀를 북에 둔 어머니…. 누군가 「카네이션」을 그 가슴에 달아주어도 슬픔이 달래어지지 않는 어머니들이다.
양로원에도 「어머니날」이 온다. 각 여성단체들이 떡과 과일을 사들고 오기도하고 꼬마들이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하루종일 성경을 읽거나 화투를 치거나 양지바른 곳에 멍하니 앉아 똑같은 나날을 보내던 할머니들에게 이날은 잊고 지낸 가슴의 한 부분을 깨워주는 자극이 된다.
노인들끼리 모여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시설 좋은 양로원이 마련되고 자녀들이 도의적인 망설임 없이 연로한 부모를 그곳에 보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전국에서 50여개로 헤아려지는 양로원에 살고 있는 2천여명의 노인들은 모두 의지할 곳이 없어 한데 모인 사람들뿐이다.
양로보험이나 연금제도를 갖지 못한 우리 나라에서 노후의 보장은 자녀들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으며, 양로원에 들어간 노인들은 국가로부터 쌀·보리 3홉씩을 매일 배급받으면서 고달픈 여생을 이어가고 있다.
어머니날은 그들에게 슬픈 날이다. 그러나 작은 정성으로 그들이 인류의 어머니이며 모든 이웃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위로를 선물할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효의 현대적 의미>의무화한 섬김보다는 스스로 흐르는 정을…|자녀중심애정으로 효의 근원 심어야 자발적 효도 솟아
벌써 십오륙년 전의 일이다. 미국에서 지내는 「크리스머스」휴가에 어느 부잣집에 초대받았다. 그 집 딸아이의 빨간 신형차를 타고 시내에 산다는 그의 할아버지 댁에 갔던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캐딜랙」을 가진 갑부요, 그래서 대학에 다니는 딸도 신형차를 가지고 있었고, 그날 「크리스머스·파티」에 할아버지를 모시러간 길이었다. 으례 잘 가꾸어진 집에 얌전한 가정부라도 있음직한 할아버지 댁에선 꾀죄죄한 노야가 꾀죄죄한 「아파트」문에서 나온다.

<노인들 소외되는 구미사회>
결국 그 할아버지는 「크리스머스·파티」에서도 아들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초라한 몸가짐으로 시종 조심성스럽게 앉아 있더니, 저녁에는 아들이 바래다주는 「캐딜랙」에 외로이 앉아 혼자 거처하는 집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 집 사람들은 이일이 너무나 당연한 것 같았지만, 내게는 대단한 충격이었고 아직도 외로운 노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났을 그 할아버지가 유난히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아마 지금쯤은 그 아버지 되던 사람이 차차 그 할아버지 행색으로 몰락해 늘어가고 있을 것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노인소외의 풍속은 어느 때부터인지는 몰라도 서구에서는 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연 전에 국내 영자신문에 이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던 일이 있었다. 미국의 이러한 노부모경시경향을 폭로한 어느 한국여성의 기고에 대해서 어느 미국인의 반발논박이었는데 그는 『그래도 미국에선 노인이 지하도에 앉아 구걸하게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자기 부모만 알고 남의 부모는 길거리 구걸에 나서도 못 본체 하는 한국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반박하고 있었는데 이 반박 역시 한번은 되씹어보아야 할 현상이라고 깊이 느꼈던 것이다.

<동양의 효는 자학적 반발설>
동양의 덕목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대목이 「효」인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침·저녁으로 부모님께 문안하며 혹시 잠자리가 찰세라 조석음식에 빠진 것이 있을세라 보살펴 드리는 것이 자식된 자의 도리요, 또 어버이의 심사에 거슬리는 일이 있을세라 우리네는 일상 언행을 조심하여 왔다.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여라』하며 자녀들은 부모를 향한 자신을 늘 자계해 왔으며 부모의 사후에도 극진한 자괴를 금치 않았던 우리네 조상의 피를 받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효의 개념은 부모자식간의 강력한 정서적 집착을 전제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부모자식간의 천륜을 바로 효의 기본으로 삼았고, 효는 가계를 이어나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어 상호간의 집착을 강요해 온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지나친 효성」을 부모에의 적개심의 반응형성으로 해석하고 있다. 부모에의 적개심을 바로 표현치 못하고 정성어린 집착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면 동양적 효성의 표현이 다분히 의식적이고 「자학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는 듯하며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자녀의 요구를 계속 거부하는 치기 어린 부모의 정에 대한 적개심을 반동으로 표현한 결과 그런 의식적이며 자학적인 효의 개념이 발달해 왔는지 모르겠다.

<상향식 부모자녀관계 지양>
「어머니날」을 맞이해서 새삼 효도하는 일을 새롭게 음미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소위 복지국가라 불리는 사회보장제도가 확립된 선진국에서 노인의 자살이 빈번하다는 것을 걱정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경직화한 의식적인 효의 표현으로 젊은이의 발랄한 자기표현이 좌절되고 부모에의 무계획적인 정서적 의존을 탈피치 못하게 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부모 자녀관계도 부분적으로 시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가족관계에서의 애정의 흐름은 효라는 개념으로 「상향」하고 있는데 이것을 건전한 자녀중심의 「하향」적 애정의 흐름으로 바꾸는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 부모는 적어도 자기가 보살펴 드려야 한다는 동양적 효의 근원을 계속 자녀들의 가치의 등뼈 속에 스며 있도록 돕는다면 지나친 애정적 집착에서 오는 불행한 반응형성이 아니요, 그렇다고 서구적인 「합리적」인 냉담도 아닌 현대 한국적 효도가 살아나지 않을까 늘 생각한다고 인간관계는 「합리적」인 것 이상의 역동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희경 이화여고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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