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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증언(17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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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낙동강전선에서 충반 격해 올라간 8군과 인천에 상륙한 10군단과의 극적인 악수는 수원남방의 오산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에서는 여러 면에서 우연한 일치가 많았지만 8군의 제1기병사단과 10군단의 미7보병사단이 연결된 오산은 「월5일에 바로 최초로 투입된 미 지상 군인· 미제갸 사단의 「스미트」 기동부대가 괴뢰군과 첫 접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대전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산에서도 미군은「스미트」기동부대가 입은 서전의 치욕을 푼 셈이었다.
「맥아더」 원수나 「워커」 강군의 인천 상륙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10군단과 8군의 연결작전에서는 미제1기병사단이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미제1기병사단장 「허버트· 고· 게이」소장은 「워커」장군으로부터 추격 작명을 받자, 제777부대라는 특별 기갑추격대를 편성하고 일노 돌진케 했다. 제7√7부내는 제7연대 강「윌리엄·A·해리스」중령을 대강으로 제7연대와 제77야포대대, 그리고 제70「탱크」대대를 기간으로 편성 된 대대였다.

<8군, 777추격대 편성>
「해리스」 중령은 777부대의 선발대로 다시 재7연대 제3대 대장 「제임즈·린치」 중령을 대장으로 하는 지대를 편성하자 주격을 개시했다. 「린치」 지대는 3대의「탱크」를 앞세우고 선산도하지점으로 전진했는데 고개에서 맹렬한 적 포격을 받았다. 이때 「게이」 사단장이 나타나 6대의 「탱크」 로 일제히 포격하면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고 대위에는 교묘하게 위장된 2의 대 전차프가 있었다. 진격 중에 도하지점을 선산에서 낙동리로 변경한다는 군단명령을 받았다.「린치」지대는 불타는 부락을 통과,5m쯤 진격하여 후퇴하는 괴뢰군 후 미를 포착했다. 적병들은 멍하고 미군「탱크」를 바라보며 손을 들고 투항했다. 낙동 리드하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급히 대전거포를 설치하고 있는 북괴군흐쿄 발견했다. 미 「탱크」의 첫 포탄이 적 탄약 적재소에 적중하여 큰 폭발과 함께 부락민가에 불이 붙었다. 이 불빛으로 수 백명의 북괴군이 무질서하게 수중 교를 건너가는 것이 비쳐졌다.「린치」 지대의 일게 사격으로 약2백 명의 적병이 물 속으로 사라졌다.
낙동리에는 신품의 T읽 「탱크」 2대와 소련제 「트럭」 50대, 그리고 야포산문 등 많은 적장비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수백 명의 포로도 잡았는데 이들은 적제13, 제1, 제13사단· 소속이었다. 「린치」 지대는 23일 새벽 에 적 저항 없이도 하롤 개시하여 한시간 후에는 교두보를 설치했다 777부대장은「린치」지. 대를 상주로 진격시키고 주력은 차람의 느하를 기다렸다회 갸일에 단숨에 상주와 보은까지 북상했으나 접전은 없었다.

<적 보급 트럭서 휘발유 보충>
한편 제l기명사단 주력은 25일 낙동강에서 도하를 완료하고 병원으로의 추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현재 선에서 일단 진격을 중지하라는 군단명령이 놨다. 군단장 프램크·밀버이 소장은 좌익의 우군24사단 진격이 금천서 저지됐기 때문에 제1기병사단이 너무 돌진하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이런 명령을 내린 것 같다. 그러나 그후 24사단도 금천을 돌파해서 26일에 제1기병사단은 다시 진격령을 받았다. 26일 정오쯤에 제8연대는 상주∼괴산∼진천도로를 따라 안성으로 향하고 본대의 앞장을 선 체777부대는 「린치」 지대를 앞세우고 청주∼천안도로를 마라 수원을 통해 북상했다.
「린치」중령은 선두의「탱크」 소대장「로버트·W·베커」 중위에게 「주속으로 진격하라, 적의 사격을 받지 않는 한 이 편에서 쏘지도 말고 그대로 달러라」고 명령했다. 하오3시쯤 청주에 들어갔는데 적은 없었다. 계속 돌진을 해서 청주북방 20km쯤 갔을 때 휘발유가 떨어졌다. 너무도 진격속도가 빨라서 연료가 뒤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린치」중령은 부대 전 차량에서 조금씩 휘발유를 긁어모아 「탱크」 3대에만 연료보급을 하고 전진시키려했다. 마침 이때 휘발유를 만재한 적 「트럭」3대가 남하하다가 미「탱크」를 보고 괴뢰운전병은 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이래서 「린치」 지대의 연료문제는 저절로 해결됐다.
부대는 하오8시쯤에 추격을 재개, 경부 국도로 진출하여 괴뢰군이 우글거리고 있는 천안을 통과했다. 괴뢰병들은 어둠 속을 지나가는 미 「탱크」들을 보고 이게 꿈이 아닌가하고 입을 딱 벌렸다.「베커」소대는 전속으로 오산을 통과하여 북방고지에 있는 적진을 돌파한 다음 우군 제7사단 제24연대 선발대와 극적인 악수를 나누었다. 9월26일 하오 10시30분이었다. 제1기병사단이 낙동리를 도하한지 4일만에 「린치」 지대는2백여km를 주파하고· 사명을 완수했다.
한편 8군과 연결할 제 24군단의 제7사단은 9월18일에 인천에 상륙하여 영등포·안양을 거쳐 23일에는 수원을 점령하고 낙동강에서 후퇴, 북상하는 적을 기다렸다. 인천상륙 후 낙동강전선에서 급히 빼돌린 적105기갑사단이 조치원부근까지 북상했다고 하여 미 제7사단은 이를 수원남방능선에서 포착,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오산북방서 적 저항 분쇄>
23일과 24일 저녁까지는 접전이 없다카 밤11시깨에 기다리던 적「탱크」가 나타났다. 7사단 26연대 제2대대는 미리 준비했던「탱크」·포병외 화력을 집중하여 4대의 적 「탱크」를 파괴했다. 그러나 25일에는 막 사용하기 시작한 수원비행장에 적이 박격포 포격을 가해와 큰 혼란을 빚어냈다. 31연는 오산북방고지에 포진한 이적부대를 남북으로부터 협격 할 계획을 세웠다.
26일 저녁에 제2대대가 정면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밤10시30분께에 낙동강으로부터 돌진해온 「제1기병사단의 선발대가 오산북방고지의 적진 속을 뚫고 들어왔다. 그러나 고지의 적은 완강히 저항하여 27일 하루종일 7사단 31연대의 제2대대가 공격했으나, 소탕할 수 없었다. 27일 정오에는 낙동강에서 배상한 게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이 오산에 진출하여 북만고지의 공격이 잘 안되는 것을 바라보고 차기사단이 도와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7사단의 31연대장「으펜사인」대령은 독단으로 이 제의룰 사양했다. 아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래서「게이」사단장은 우군사단의 격전을 그저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28일 7사단장「데이비드·바르」소장이 진두에 나와 50문의 야포로 30분 맹 포격을 가한 후 공격을 재개하여 오산북만 고지의 적을 소탕했다. 이렇게 해서 8군과 10군단의l연결은 완전한 것이 되었다.
한펀 창령 방면에서 돌파를 시작한 미 제2사단의 진격도 순조로 왔다. 24일에 2사단38연대와 23연대는 합천을 동남에서 공격하여 적 제2,제4,제9사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25일에는 도보로 거창 분지에 도달하여 여기서 잔적과 격전 끝에 대전거포문, 포정문, 「트럭」17대, 탄약3백t을 노획하고 4백50명의 포로를 잡았다. 38연대는 26일에 깡그리 불탄 거창에 돌입하고 23연대는 안희에 진출했다.

<창령서 전주 거쳐 논산진출>
안의에서는 적 박격포의 기습 폭격을 받아, 대대장 이하 25명의 사상자를 냈다. 38연대는 28일 거창을 출발하여 산발적인 적 저항을 물리치면서 이날 밤 중에 진안을 거쳐 전주에 진출했다.
9시간 반에 7O여km의 적진를 돌파한 것이다. 29일에 전주서 연료보급을 받고 진격을 계속하여 3O일에는 강경과 논산에 진출하여「로롄스·B·카이저」소령의 미 제2사단의 돌파는 완성됐다.
마산방면의 미 제25사단의 경우는 적6사단장 만호산이가 지뢰원을 매션하는 등 비교적 교묘한 후퇴작전을 하여 다른 사단에 비해 약간 진격 속도가 느렸다. 25사단의 제35연대는 25일에 진주를 탈환하고 제27연대는 26일에 의령에 진출했다.
235일 밤에 추격, 최종 목표 지점을 군산으로 정한 제25사단장「윌리엄·B·키이」소령은 2열종대로 지리산을 포위하는양 추격하기로 결정하고 제35연대를 우추격대로 해서 진주∼함양∼남원∼전주∼이리∼강경 선으로, 제24연대를 좌추격대로 진주∼하동∼구례∼남원∼순창∼김제∼이리∼군산 선으로 진격케 했다.
이런 추격계획은 적 제6, 제7사단 패전부대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는데 있었지만 실제로 상당수의 적 병력이 입산했다.

<남원서 미군 포로 86명 구출>
좌추격대는 26일에 적의 산발적인 저항을 ,받으며 하동 고개를 넘었다. 이 고개는 7월 27일에 미군19연대의「모트」대대가 궤멸하고 채병덕소령이 전사한 곳이었다. 하동에서 미군포로2명을 구출했는데 이들은「모트」대대의 생존자들로서 피골이 상접돼있었다.
24연대의 선발대가 28일에 남원에 들어갔을 때에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fp이퍼스」 상사가 탄 선두 「탱크」가 후미「탱크」가 도랑에 빠진 것을 모르고 단독으로 남원에 돌입했다. 이때 읍내에는 아직 많은 적이 우글거리다가 때마침 날아온 미「제트」기에 정신이 팔려「탱크」의 진입을 모르고 있었다. 비행기가 사라진 후 비로소 미군 「탱크」를 보고 많은 적병들이 혼비백산, 도주했다. 남원에서는 이렇게 적이 급히 도주하는 바람에 86명의 미군포로를 구출 할 수있었다.
우추격대의 선발대도 이날·남원에서 좌추격대와 합류하여 29일에는 정읍과 이리를 탈환하고 30일에는 사단의 추격목표인 군산을 전혈첨령했다. 진주∼산청∼함양선을 진격하던 미군은 지뇌원과 교량의 파괴동으로 진출이 부진했는데 이는 앞서도 지적한바와 같이 적사단장 방호산의 교묘한 후퇴 작전 때문이었다.
미25사단도 9월30일까지는 맡은바 추격 임무를 완료했다.
※알림=미군의 포로 심문부대에 통역으로 복무한 분은 「민족의 전언」 담당자 앞으로 연락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전화(28)82l1 (교환) 의 74번 야간은(84)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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